160cm인 내가 고개를 살짝 들어야 보이는 엘리베이터 입구, 언제부턴가 인테리어 공사 안내문이 붙어있다. 지금까지 본 안내문 중에 가장 구체적이었다. 소음으로 야기될 민원에 철저히 준비된 안내문은 어디를 수리하는지, 며칠이 걸리는지, 소음이 크게 발생하는 날짜까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와 하루를 살아내기도 정신없는데 안내문이 내 머리에 남아있길 바란다면, 그건 22개월 된 우리 아이에게 어제 먹은 반찬을 떠올려 보라는 것과 매한가지다. 오후 2시,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들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낯선 기계소리에 아이가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금방 진정됐지만4시까지 보장된 나의 휴식시간이 사라졌다.
아이를 꽁꽁 싸매 유모차에 탑승시키고, 남편이 작아서 입지 못하는 패딩을 덤덤히 걸쳤다. 소매가 길어 겨울에 유모차 밀기에 안성맞춤이다.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계산대로 향했다. 모녀 사이인 듯, 그들이 가볍게 주고받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엄마도 여기에 포인트 만들까?'
'어, 그렇게 하라니까.'
'근데 엄마는 여기 사람이 아니잖아.'
그분이 사는 곳은 여기에서 30분 정도 거리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먼저 나서는 엄마를 딸이 금방 뒤쫓아 가더니 홱- 낚아 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오늘 아침에도 전화로 30분 넘게 수다를 떤 '우리 엄마'가 아른거렸다.
결혼과 동시에 친정과 1시간 30분 떨어진 곳에서 살림을 꾸렸다. 원가정에 애착이 많았던 나에게 그 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고, 또 멀었다. 행복한 신혼이었지만 친정만 떠올리면 그리워 눈물이 났다. 딱 지금 이 맘 때쯤이었다. 겨울을 온몸으로 느끼는 12월.
웨딩사진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식탁 중앙엔 꽃말이 축복인 포인세티아를 놓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딱 중간이었다. 따뜻해지고 싶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근처 목욕탕으로 향했다. 구석구석 따뜻함이 배길 바라며 온탕에 몸을 담갔다.
땀방울이 송글 맺힐 때 쯔음,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엄마와의 추억이 생각났다. 우린 12월 겨울만 되면 목욕탕에 갔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곱씹기도 했고, 운동하길 싫어하는 아빠를 밖으로 나가게 하는 방법, 남동생의 미래를 걱정하며 이야기 김을 피웠다.
이상하게 목욕탕을 갈 때 목욕바구니는 내가, 돌아올 땐 항상 엄마가 들었다. 수건으로 살포시 덮어도 군데군데 삐져나온 속옷을 가리키며, '아는 사람 만날라' 이 한마디로 바구니는 엄마 차지였다. 엄마와 추억이 한아름 내려앉은 목욕바구니를 들고, 털레털레 홀로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가 생각난다.
날씨가 춥다.
엄마와 목욕탕에서 나눈 따뜻한 말이 생각나는 12월이다.
이젠 더 멀어져 기차로 2시간, 차로 30분을 꼬박 가야 만날 수 있는 우리 엄마가 참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