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 맨 의 첫걸음

by 신비아

그때는 아직 스마트 폰도 구글 맵도 없었다. 삐삐 하나 챙겨 넣고 두툼한 토머스 가이드라는 지도책에 수없이 노란 마크로 줄을 그어가면서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때 남산으로 소풍을 갔다. 걸어서 아이들과 내려오는 길가에 조그만 나무 철장 속에 갇힌 새가 철장문을 열어주면 날아가는 것을 잊은 새가 나란히 정리돼 있는 종이 한 장을 무작위로 뽑아 준다. 그 속에 점괘가 들어 있는 “새점”이었다. 겨우 한글 깨친 눈으로 읽어보니 “동서남북 분간을 모르는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그즈음 엄마에게서 매일 동서남북 이 어느 방향인지 교육받는 중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쪽을 동쪽이라 하고 저쪽을 북쪽이라고 하는지 이해 못 해서 질질 짜고 울 때었다. 점괘 종이를 가져다 엄마를 보여 주니 어쩌면 그렇게 똑똑한 새 가 있냐, 너보다 낫네. 태어날 때부터 길치 가 맞다.


다 커서도 여전히 어디가 어딘지 분간 못하는 내가 손님들에게 집을 보여 준다고 미리 둘러보고 다니면서 1시간을 헤매다가 포기하고 이건 내 적성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좌절했다. 어차피 돈 은 벌어야겠고 뭐 할 줄 아는 것도 특별히 없고, 이민생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팅겨야 했으니 동쪽에 길 없으면 서쪽으로 가보자. 그 시절엔 아직 한국사람이나 여자들이 사업체 나 상가 건물 등 커머셜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여자 부동산 세일즈 업자가 거의 없을 때었으니까 오히려 전화위복의 결정이었던 같다.


자. 길가에 널린 게 가게들이고 상가들이니까 모든 것이 나의 먹거리다. 각오는 투철했다.

그러나 내성적이고 처음 보는 사람과 말 섞기도 싫고 더구나 영어로 주절 거리는 건 더욱 질색하던 내가 어떻게 이 일로 밥을 먹을까. 더한 낙담과 좌절이 매일 밤을 괴롭혔다.

세상에 남은 작은 딸아이 하나. 하다 하다 안되면 딸아이 둘러업고 죽어야 하나?

단돈 100불 도 기댈 곳 없는 나 는 엄마였다.


봉제 공장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 하니까 주인이 재봉틀 빌려주고 일감을 주었다. 밤새 밟아도 일당은 50불 정도, 그래도 해야만 했다. 아침에 유치원 데려다 놓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차에는 물과 땅콩 등 허기를 달래줄 스낵들 챙겨서 종일 알지도 못하는 사업체들과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한국말 로도 가게 파세요. 상가 파세요 해본 적도 없는 내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건 맞는 것 같다. 세일즈에 관한 책을 사서 달달 외우고 사람들에게 사업체 팔아볼래요? 손님이 있어요. 사무실에서는 노느니 염불 한다고 종일 앉아서 “Cold Call”을 했다. 지금은 전화 세일즈에 염증이 날 정도로 시달리지만 그때는 전화 세일즈가 많지 않을 때였으니 아직 살만했던 것 같다. 50에서 100번 정도 전화 하면 정말 팔고 싶으니 한번 방문하라고 하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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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시킬 자신이 없어서 가게 문밖에서 하염없이 그냥 서있다가 돌아설 때가 더 많았고 전화 걸어놓고 먼저 툭 끊어버리곤 했던 내가 첫 수표를 받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짜릿하다.

커머셜 중개인으로 시작한 지 1년 만에 5만 불 이상의 실적을 올렸지만 회사와 나누는 부분이 반, 감출 수 없는 세금이 반, 그렇지만 딸아이를 굶기지는 않겠구나 라는 희망으로 가득한 첫해였다.


세월은 갔고 딸아이는 잘 자랐다. 이제는 미국 대형 영화사에서 프로듀서로서 일 하면서 가끔 용돈도 쥐어준다. 세일즈의 첫걸음은 막막하다.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어디서부터 첫걸음을 나서야 할지 등대도 없고 지도도 없다. 어떤 직업이던지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지만 역시 우리가 누구인가.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우리는 대한민국 DNA의 결정체 들이다.


(2월의 봄비 내리는 뒷마당)

2026 1월과 2월 에는 몇날 며칠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1년에 몇번 비오는 날 에는 마치 축제라도 하는듯 행복하고 괜히 나른해지고는 한다. 촉촉해진 비내리는 뒷마당 에서 하염없이 커피 한잔 들고 멍때리고 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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