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大) AI 시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고른 음악이 흐르고, 냉장고는 부족한 식재료를 알아서 주문한다. 저메추(저녁메뉴 추천) 같은 쓸데없는 질문을 할 때도 AI는 과거의 내 식사기록을 찾아보고 정중히 파인 다이닝 접시를 내려놓듯 추천해 준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예술과 창작마저 숫자의 조합으로 치환되는 시대다. 지브리 풍 프로필 사진의 컬트적인 인기는 이를 방증하는 셈일 것이다.
사실 나도 이러한 변화에서 예외는 아니다. 기계에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업무 현장에서 ChatGPT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곤 한다. 흉부 X-ray 판독에서 미세한 이상 징후를 잡아내거나, 복잡하게 얽힌 환자의 과거력과 방대한 투약 이력을 정리할 때 AI는 경이로운 속도로 나를 돕는다. 인간의 피로와 주관이 개입할 틈 없는 그 정교한 정확도를 마주할 때면, 기계에 맡겨도 좋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토록 유능하고 안락한 세계에서, 뭔가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AI가 나온다고 해도 그는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다. 전지전능한 그는 나의 유튜브 시청기록, 네이버 검색, 자주 사용하는 카드사를 알 지라도 나와 깔깔거릴 수 없다. 저속한 농담을 나누고 눈물을 뺄 만큼 웃을 수 없다. 주제넘게 그를 놀리는 나의 팔에 힘껏 펀치를 날릴 수 없다. 비아냥대는 웃음을 짓는 나에게 일침을 날리며 맞불을 놓을 수 없다. 쓸데없는 토론, 이를 테면 애니메이션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진짜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1시간 넘게 이야기할 수 없다.
AI의 적절한 반응, 그러니까 대답은 데이터의 집합이겠지. 이럴 땐 이런 말을, 저럴 땐 저런 말을 건네는 게 최선이야. 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연인의 어딘가 모자라는 대답을 좋아하고, 친구의 얼빠진 얘기에 웃고, 비장한 모습으로 내뱉는 헛소리를 감상한다. 급소를 찔린 좋아하는 사람의 동공지진을 보고 싶다. 눈이 흔들리며 이상한 변명거리를 내뱉는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싶다. 대 AI 시대에 반하여, 우리가 여전히 인간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인간만이 지닌 서툰 곳에 사랑이 깃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