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맥없이 웅크린 돌부처가 있다. 팽나무 아래 묻혀 맞은편 국도를 보고 있다. 2차선 도로가 뚫리던 날 불자들은 부처를 이곳으로 옮겼다. 시멘트를 섞어 새로 만든 기단은 여전히 서툴다. 반들반들하게 갈린 불상의 이마께에 눈이 쌓인다. 쌓이고, 녹고, 또 쌓인다. 세상에는 이렇게 잊혀가는 것들이 있다. 큰 절이 있었다고 했다. 처마 끝 풍경 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고 했다. 지금은 허물어진 담장 하나가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담쟁이가 절반쯤 먹어치운 그 담 앞에서 문득 앉아본다. 차들이 쌔앵 지나간다.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로 신을 지나친다.
옛 신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잊혀진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전부였다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는다. 발굴 보고서에 몇 줄 적히거나, 박물관 한구석에 놓이거나. 그래도 다행이다. 대부분의 신들은 흙 속에서 썩어 문명의 지층이 되어버렸으니까. 인류학자들이 발굴해낸 토기 파편 위에 그들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가끔은 그 흔적조차 읽어내지 못한다. 아니, 읽으려 하지도 않는다.
요즘은 새벽에 잠이 깨면 라디오를 듣는다. 전파가 잘 잡히지 않는 주파수를 더듬다가 우연히 찾은 채널이 있다. 새벽 두 시, 노파가 간절한 목소리로 예수를 부른다. 전도자의 목소리가 잡음과 뒤섞여 들린다. 듣다보면 잡음과 기도가 구분되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의 신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건 잊혀진 신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이국의 박물관에서 본 미라가 생각난다. 유리관 속에서 2000년을 견딘 시신. 그들은 영원히 살기 위해 미라가 되었다. 영원한 삶을 약속한 신을 믿었다. 하지만 그 신은 사라졌다. 오시리스도, 이시스도, 아누비스도 더는 없다. 남은 건 썩지 않은 시신뿐이다. 오히려 신이 썩어버린 셈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당 한쪽에 정화수를 떠놓으셨다.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고, 손주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 물을 마시러 오는 건 길고양이뿐이었지만. 어머니의 신은 누구였을까. 정화수를 마시던 그 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끔은 정화수 떠놓은 마당 앞에서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신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지하철역 앞 광장에서 늙은 전도사가 마이크를 잡고 있다. "회개하라, 주님이 오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전도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마이크는 Made in China이다. 중국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확성기로 신을 부른다. 그가 부르는 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플라스틱 마이크에 실려나오는 찬송가를 들으며 미소 짓고 있을까. 아니면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신은 가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폐허가 된 절 마당의 민들레꽃에서. 오래된 십자가의 녹슨 못자국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는 아잔 소리에서. 어쩌면 신은 잊혀지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잊혀짐으로써 영원해지기 위해. 그래서일까. 잊혀진 신들은 때때로 아름답다. 부서진 불상의 미소처럼, 이슬 맺힌 정화수처럼, 새벽녘 전파 속 노파의 기도처럼.
퇴근길에 늘 지나는 작은 동네 신당이 있다. 깨진 창문으로 촛불이 보인다. 누군가는 아직도 이곳에서 신을 만난다. 그들의 신은 살아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러니까 먼 훗날에는. 이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24시간 형광등이 켜진 곳에서 컵라면을 데우는 사람들. 그들은 모르겠지. 이곳에 신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는 전부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