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40대 이상, 특히 중년 남성은 늘 불편함의 대상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당시 조직의 리더 대부분이 남성이었기에 그 불쾌한 리더십의 투사체가 그들이었을 뿐, 이 글은 성별의 차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사회 초년생이 그 윗세대의 리더십을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막상 그 세대가 되고 나서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소회 하는 글이기도 하다.
조직이 한참 커나갈 때 운 좋게 입사한 그들은 나이가 들면 당연히 승진하였고 어느 조직의 수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책임을 지라고 쥐어진 권위가 막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을 보며 , 리더십의 민낯은 실력이 없음에서 오는 불확실성이었고 이를 우기기 위한 독단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나이에 도달해 보니, 그토록 경멸했던 그들의 투박한 모습은 '버텨냄의 비명'임을 인정한다.
그 비굴함은 생존을 위한 최선이자 최후의 수단이고 이제 나는 그들과 같은 나이가 되어 더 자세히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마음과는 다르게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이며 책임져야 할 대상과 그 무게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인생이란 연극의 4막 무대에서 강요된 비루한 배역이기도 하다.
그 비루함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성실성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가장 늦게 퇴근하는 그 성실함은,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도피처이기도 하다.
그 공백을 육체의 피로로 메우며, 스스로가 여전히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사무실의 꺼지지 않는 불빛 아래서 자신을 소진했다.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서 튕겨 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저 근면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비루한 배역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내가 경멸했던 그들과의 유일한 차이, 한 문장 남겨두고 싶다.
실제 닥친 삶의 공포를 권위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권위가 너무나 나약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이 '운 좋게 얻은 자리'가 아니라 '버텨낸 자의 끈기'임을 똑똑히 응시한다.
연극은 계속될 것이고 그것이 생존을 위한 비열함일지라도, 적어도 나는 내가 어떤 무대 위에서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끊임없이 사유하며 걷겠다.
그것이 내가 40대의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