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하루

머무르는 생각

by 원하나

스트레스를 한껏 받은 날이면 어김없이 짐을 챙기고 부시시한 얼굴을 가릴 만한 모자를 찾아서 쓴다.

초록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걸려서 '시간이 천천히 가는 곳'이라고 내가 부르는 서점으로 간다.

이상하게 서점에 딱 들어서는 순간,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는 기분이다.


사실 책을 특별하게 많이 보거나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사실 책보다 드라마나 영화 덕후임. 안 본 드라마가 없을 정도)

그럼에도 발길이 항상 그 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공간의 힘 때문인 거 같다. 그 곳에 가면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외에도 참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인터넷이 다양한 걸 볼 수 있다는 데 나한테는 해당사항이 아닌 거 같다. 알고리즘 탓인가 계속 같은 것만 반복해 뜬다.


한 두시간정도 걸려 있는 책들을 살펴본다. 난 주로 작가의 말이나 표지 뒤에 써있는 추천글을 읽는다. 작가의 말을 보는 이유는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의도가 맘에 들면 거의 다 읽는 거 같다. 결국 책도 사람이 쓰는 거기에 그 사람의 생각이 마음에 들면 책도 거의 내 스타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서점 한 바퀴를 돌고 나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간다. 항상 가는 카페에 항상 앉는 자리가 있다. 창가 근처에 앉아 따뜻한 초코라떼를 마시면서,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다.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분들,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분들, 연인, 가족 등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상하게 피로한 눈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거 같다. 그렇게 한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초록색 버스를 타고 동네로 온다.


마지막 코스, 코인노래방에 간다. 아마 오늘 처음으로 입을 떼는 거 같다. 40분 정도 혼자 노래를 실컷 부르고 딱 나와서 집에 가는 길은 마음이 참 좋다. 하늘도 이뻐 보이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침에 들었던 무거운 마음이 몇 시간만에 다시 정돈되었다.


언젠가는 이 루틴도 먹히지 않을 때가 올 거 같다.

(사실 몇 번 위기가 있었으나 다시 시도하니까 효과가 다시 생겼음)

이 루틴으로 해결될 수있는 무거운 마음들만 왔으면 좋겠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는 어지러운 마음들을 정리해준다.


빠르게 없어지고 빠르게 생기는 세상 속에서 내가 머무른 공간들은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사실 요즘 단골 가게들이 많이 없어지면서 서운하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가게들을 찾아야 한다는 게 별로다.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많이 느끼고 있는 만큼, 그 곳들이 천천히 변했으면 좋겠다. 머무르는 마음이 긴 편인 나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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