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 마라톤 완주는 적어도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난생처음 배번표를 달고 도로 위를 활개 치며 달렸고, 완주메달이란 것도 목에 걸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내 마음가짐도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다. 적어도 그게 달리는 일이라면 말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10km를 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나를 무한한 자신감의 영역으로 이끌었고, 자신감은 자연스레 나의 시선을 다음 단계인 하프코스 마라톤으로 이끌었다.
'이걸 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의심은 단 1%도 없었다. 하프코스 마라톤을 검색하고, 제일 빠른 일정의 대회 참가 접수를 마쳤다. 이 모든 일이 10km 코스를 완주한 날 이루어졌다.
멘탈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21.0975km를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드는 일이다. 일단 뭐든지 계획부터 세우고 시작해야 마음이 편한 INFJ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훈련 일정을 짜는 것이었다. 대략 계산을 해보자. 대회까지 앞으로 8주. 일단 첫 주는 회복이 필요하니깐 제외, 마지막 주는 tapering(*서서히 훈련량을 줄이는 것)을 해야 하니깐 빼고 나면 남는 것은 6주이다. 지금까지 내가 뛰었던 최대 거리는 13km. 그럼 대략 8km를 더 뛰어야 하니깐 한 주에 1.3km씩 거리를 늘려야 한다. 여기에 기록 단축을 위한 인터벌 훈련, 근력 운동 계획까지 더하고 나니 빈틈없이 빡빡한 일정표가 나온다.
'이게 가능할까?' 막상 훈련계획을 짜고 보니 괜한 객기를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미 질러놓은 일 아니겠는가!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어찌하겠는가! 일단 못 먹어도 Go!
하지만 훈련은 시작과 함께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10km 대회가 끝나고 이틀 후, 다시 러닝을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아파트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를 뛰는데 초반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돌아와 발목을 확인해보니 퉁퉁 부어있었다.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일을 그르쳤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걷기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절룩거리며 한의원을 찾아갔지만,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금쪽같은 시간들을 허송세월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애타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초조한 마음은 커져갔다.
하프코스 마라톤 도전을 선언하고 2주가 지났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 나는 광교산으로 향했다. 발목의 부기가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라톤 연습을 하기에 좋은 장소를 물색해서 알게 된 곳이 바로 광교산이다. 광교산 주차장부터 등산로 입구까지 이어진 4.3km의 도로는 약간의 오르막 경사인데 원래 한산한 도로가 주말의 새벽은 더욱 한산해서 마라톤 연습하기에는 딱이라고 한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동도 트지 않은 새벽부터 차를 몰아 광교산으로 향했다. 스산할 정도로 한산한 도로를 보니 그 말이 거짓부렁은 아닌 듯 싶다. 평소라면 30분 정도 걸릴 거리를 10분 정도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섬뜩한 한기였다. 3월이니 동장군도 이제 슬금슬금 꽁무니를 뺏으려니 했건만, 그건 오산이었다. 한치도 위세가 꺾이지 않았다. 크게 숨을 내쉬자 허연 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고, 주차장 계단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조심조심 잘 보고 올라가야 했다.
달리기 전 스트레칭은 필수이지만, 바들바들 떨게 만드는 추위 때문에 자꾸 꾀가 난다. 대충 몇 가지 스트레칭만 하고 마지막으로 아팠던 발목만 몇 바퀴 빙빙 돌린 다음 바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광교 저수지를 따라 데크 위를 뛰었다. 내쉬는 숨마다 하얀 김이 서렸고, 찬 바람에 몸은 떨렸지만, 두 발이 데크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호수 위로 아련하게 피어오른 새벽안개를 감상하는 것은 꽤 낭만적이었다.
첫 페이스는 7분/km. 평소보다 조금 느린 페이스였다. 부기도 빠졌고, 걸을 때도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아직 발목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발목은 아프지 않았고, 오들오들 떨리던 몸도 서서히 달아오르며 칼처럼 날카롭기만 하던 새벽 공기가 어느 순간 꽃피는 봄날의 바람처럼 순하게 느껴졌다.
1.5km 지점, 더 이상 호수의 전경을 보며 달릴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는 산속으로 이어진 도로 위를 달려야 한다. 도로는 약간 오르막 경사였다. 오르막은 평소보다 나를 빨리 지치게 했다. 3k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처음처럼 낭만에 젖어 달릴 형편이 못 되었다. 숨은 가빠지고 두 다리는 무거워졌다. 갈수록 경사는 심해졌고, 그에 비례해서 심장의 요동은 강렬해지고 호흡은 요란스러워졌다. 계속 스마트 워치를 보면서 뛴 거리를 체크하는데 바람대로 숫자가 팍팍 늘어나지는 않았다.
등산로 입구가 나왔다. 4.3km 도로의 끝이다.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 뛰어올라온 길로 다시 내달렸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이니 한결 수월하다. 여유를 찾으니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도 하나둘 들어온다. 햇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집인지 강아지들 여럿이 한 번에 시끄럽게 짖어댔고 지푸라기 태우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구수하게 풍겨왔다.
상큼하고 깨끗한 아침의 향기와
구수하게 밥 뜸 드는 냄새가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비록 계절은 정반대인 3월이지만 아이유의 '가을 아침'을 떠올리며, 다시금 '낭만 러너'가 되어본다. 호수처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시골 냄새나는 구수한 아침 풍경이 나를 기분 좋게 해 준다.
어느덧 다시 출발점이다. 8.6km를 뛰었다. 이 정도면 첫 훈련 치고 괜찮은 성과였지만, 살짝 욕심이 났다. '발목도 멀쩡한 것 같고, 내친김에 최고 기록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4.4km만 더 뛰면 최고 기록이다. 3km만 더 뛰어갔다가 내려오면 15km 가까이 달리게 된다. 잠시 고민은 했지만 별로 지체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최고 기록에 대한 열망으로 힘든 것도 잠시 잊고 다시 힘차게 내달렸다. 페이스도 빨려졌다. 기록도 앞당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욕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발목에 이상을 느꼈다.
'그만 달려야 하나? 조금만 참고 달려볼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도 욕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쩌면 스쳐가는 통증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행복 회로'를 돌렸다. 그러나 강렬한 통증이 뇌리에 전달된 순간, 본능적으로 두 다리가 멈췄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조심스레 왼쪽 발목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 발목 위로 손을 얹으니 퉁퉁 부운 발목이 느껴졌다.
'망했다!' 마라톤 대회까지는 앞으로 6주. 하지만 또다시 부상의 늪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꼴이다.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앞일이 막막했다. 결국 신나게 뛰어올라온 길을 절름절름 걸어서 내려왔다. 호수의 풍경은 변함이 없었지만 더 이상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