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을 적으시오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성장기
레깅스 안에 압박 스타킹까지 신었지만, 에일 듯이 차가운 새벽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못했다.
'새벽부터 사서 고생이군.'
오랜만에 새벽 러닝을 나왔는데, 괜한 객기를 부린 게 아닌가 싶었다. 섬뜩한 바람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출발지점까지 이동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스트레칭은 필수지만, 꼼꼼하게 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건성건성 몇 번 몸을 푸는 둥하다 냅따 내달린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몸이 덜 풀려서 그런지 조금 숨이 찼다. 내뱉은 공기가 마스크 안에서 순식간에 얼어붙어 볼이 시렸다. 길가에는 아직 며칠 전 내린 눈이 군데군데 남아있었고, 작게 패인 홈에는 얼음이 채워져 있었다.
조금씩 해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아파트 위에 걸려있다. 해가 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니면 뛰느라 몸이 달아오른 건지 아무튼 약간 덥게 느껴졌다. 턱 밑까지 바짝 올렸던 패딩 지퍼를 조금 내렸다. 옷 속에 갇혀 있던 후끈한 열기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오고 그 빈자리를 찬 공기가 대신 채워주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 살짝 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지만, 흐를 정도는 아니었고,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더 이상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시자 찬 공기가 한아름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마치 공기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았다.
'겨울 러닝은 역시 이맛이지!'
한 겨울에 하는 새벽 러닝에는 묘한 맛이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 1등석에서 먹는 인스턴트 라면 같은 혹은 홀연히 떠난 백패킹에서 마시는 최고급 원두커피 같은 느낌이랄까? 둘 다 해본 적은 없지만 대략 그런 맛이다.
달리기의 매력.
그 오묘함에 빠져든 것은 3년 전이다. 뭣도 모르고 시작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마라톤 대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
풀코스 마라톤 완주!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그 꿈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을 때즈음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마라톤? 왜 그렇게 힘든 걸 하는 거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 해야 할지 대뜸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마라톤을 하는 거지? 죽을 만큼 힘든데 왜 뛰고 있지?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후에도 한동안 그 질문을 곱씹으며 답을 찾으려 애썼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돌다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장래희망을 적으시오'
어릴 적에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이런 설문에 답을 해야 했다. 학교를 다닐 때 장래희망은 가방 속의 필통처럼 마음속에 꼭 새겨 넣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장래희망이 무엇인가요?"
누군가 마흔 살이 넘은 지금의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다. 아직 인생을 절반도 안 살았는데,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왜 지금의 나에게는 더 이상 장래희망을 묻지 않는거지? 심지어 나 조차도.
달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아마 이번에도 10km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달린다. 어쩌면 더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언젠가는 풀코스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마흔 살이 넘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허무한 공상만은 아닐 것이다. 오직 스스로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껍질 따위만 아니라면, 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넌 커서 뭐가 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