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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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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Aug 27. 2022

기억주사 #1. 김부장

김부장은 오늘도 퇴근이 늦다.

금요일 저녁,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이 날만하지만, 김부장에게서 그런 조급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혼자 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벌써 2시간째 중고차 사이트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나름 대기업의 부장인데 가오를 생각하면 잘 나가는 독일제 세단 정도는 타야 되겠지만 하나같이 엄두가 안나는 가격들뿐이고, 간혹 값도 맞아떨어지고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있어도 괜히 허위매물은 아닌지 의심병이 도져서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김부장은 15년째 타고 있는 그의 애마를 아직 버릴 생각도 없다. 그냥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중이다.


"부장님 9시가 넘었는데 아직 안 들어가세요?"

"어...."


건너편 자리의 정대리가 퇴근하는 길에 오늘도 사무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김부장을 보고 인사를 건네지만, 김부장의 대답은 한 건지 만 건지도 아리송하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요."


회사에서 똑 부러지게 일 잘한다고 소문난 정대리는 뻔뻔하게 시간만 때우고 있는 김부장이 평상시에도 영 못마땅했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심히 마우스 스크롤만 드륵드륵 돌려대는 꼴을 보니 괜스레 울화가 치민다.


'야근비로 또 얼마나 회사를 빨아먹으려고 저러시나?'


정대리도 월급쟁이 신세이니 딱히 김부장이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김부장의 뻔뻔함이 얄밉게만 보인다. 정대리는 제 몸에 붙은 거머리 보듯 김부장을 쏘아보다 고개를 휙 돌려서는 가던 길을 간다. 김부장은 그런 정대리의 따가운 눈총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래 김부장이 사람들의 평판 따위에 관심이 없긴 하다. 그럴 만도 하다. 이제 정년퇴임까지 몇 년이나 남았다고. 그가 회사에서 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오직 하나 조금이라도 더 회사 월급 긁어모아서 마지막 퇴직금으로 두둑이 한몫을 챙겨 나가는 것뿐이다.

그래도 김부장이 완전히 밴댕이 소갈딱지인 양반은 아니다. 지난번 회식 때도 3차에서 전부 다 인사불성이 된 와중에 김부장이 술값을 계산한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김부장은 사실 속이 좀 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장 체면에 사람들에게 "N빵 합시다"라고 말도 못 하고, 속만 끓다가 크게 인심 한번 쓰는 걸로 아린 속을 달랬다. 그러니 이런 손가락질이 김부장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김부장은 정대리가 퇴근한 뒤로도 30분이 지나서야 모니터에서 겨우 시선을 뗐다.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넓디 넓은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김부장말고 아무도 없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대략 계산을 해보니 목표한 야근수당은 다 채운 듯했다. 이제 김부장도 퇴근할 때가 되었다.


김부장은 주섬주섬 가방에 짐을 챙겨 사무실 문을 나선다. 그가 퇴근을 서두르지 않는 그럴만한 이유는 또 있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그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찍 들어가 봐야 컴퓨터 아니면 TV 보기가 전부인데 기왕이면 사무실에서 돈이라도 좀 더 벌다가 가는게 나은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 김부장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다들 야박하게 김부장을 뒤에서 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어쩌다 김부장은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조차 못했단 말인가? 아마 신입사원 시절의 김부장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일은 상상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래도 김부장은 30년 전에는 꽤 잘 나가는 사원이었다. 신입 때는 연말 송년회 시상식에서 우수사원으로 뽑힌 적도 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만 산 게 문제였을까? 그냥 열심히만 살다 보니 변변찮은 연애 한 번 못하고 한 해 두 해 흘러가고, 마흔이 넘은 뒤에 정신 차리고 남들 다하는 결혼 나라고 못할까 아등바등해보지만 그제는 마땅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김부장이 그리 열심히 결혼상대를 찾아 애쓴 것도 아니다. 김부장 입장에서야 기껏 번 돈 누군가와 나눌 필요도 없고, 혼자 지내는 것도 딱히 불만이 없으니 누군가와 같이 부대끼며 살고 싶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다만, 살아생전 손주 보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노모의 소원을 결국 이뤄드리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내드린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걸림돌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김부장은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언제나 그렇듯이 김부장은 제일 끄트머리 좌석에 앉아 언제나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들을 뒤져본다. 이미 점심 먹고 다 본 것들 뿐이라 별로 흥미가 가는 뉴스는 없었다. 그렇게 무심히 뉴스들을 넘겨보다 작은 광고 배너 위에서 손이 멈췄다.


"임상시험 대상자 모집"

참가 문의는 xxx-xxxx-xxxx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 참가비 지급)


'임상시험? 돈은 얼마나 주려나?'

돈벌이가 궁한 김부장은 아니지만, 주말에 딱히 시간을 때울만한 꺼리가 필요했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했다.


'가면 돈도 벌고 끼니도 해결하고 시간도 때울 수 있는 건가?'

생각할수록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김부장은 일단 광고 속 전화번호를 저장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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