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지만 김부장은 여느 때와 같이 칼같이 일어나서 이불 정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이불 정리부터 하라!"는 격언을 접한 후 생겨난 습관인데, 집안이 깔끔해진 점 외에 딱히 바뀐 것은 없었다. 하지만 깔끔한 걸 좋아하는 김부장은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아직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아침은 간단하게 미숫가루 한잔으로 해결한다. 최대한 설거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보통의 토요일이었다면 이제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회사 대신 어젯밤 지하철에서 우연히 알게 된 임상시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생각이다. 김 부장은 아침 먹은 것을 정리한 뒤에도 한동안 식탁 의자에 앉아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9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정각 9시가 되자마자 어제 저장해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ILS 바이오로직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확히 두 번 전화벨이 울린 뒤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로는 20대 아니면 많아야 30대 초반 정도인 듯했고, 팽팽한 텐션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상당한 하이톤이었다. 단 한마디였지만 특유의 억양에서는 전문상담사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안녕하세요. 임상시험 참가 모집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네. 광고 보고 전화 주셨나 보네요. 그런데 저희가 자세한 상담은 대면으로 진행하고 있어서 먼저 저희 센터에 방문하시고 몇 가지 동의서를 받아야 상담이 가능한데요. 괜찮으실까요?"
'방문을 해야 한다고?'
김 부장은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시 대화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오려고 했다.
"그전에 지원자격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수당도 있는 거 같던데...?"
"네, 간단한 심사절차는 있지만, 만 19세 이상에 크게 아프신 데만 없으시면 되고요. 참가지원금은 방문 후 안내를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걱정 안 하셔도 되는 게 저희가 좀 일반적인 임상시험과는 달라서 금액은 생각하시는 것보단 많을 거예요. 그럼 방문 예약을 도와드릴까요?"
주말이라 딱히 할 일도 없던 김 부장은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이 들었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돈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준다 하니.
"전 오늘도 괜찮긴 한데..."
"아 그러세요? 여기가 역삼역 3번 출구 근처인데, 혹시 오후 1시 정도까지 이쪽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거기라면 익히 잘 알고 있다. 바로 김부장 사무실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위치이다.
"네,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정확한 위치는 핸드폰 문자로 남겨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뒤에 뵐게요."
김부장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통화 내용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느라 그랬다. 이젠 머리 회전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되짚어보는 습관은 그가 30년 사회생활에서 체득한 버릇 중에 하나이다. 그때 김부장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임상시험 상담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적힌 문자였다.
김부장에게는 꽤 오랜만의 외출이다. 집과 회사 외에 다른 장소에 가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서인지 낯선 곳으로 향하는 김 부장의 마음은 살짝 긴장되었다. 그의 오래된 세단이 김부장과 함께 도착한 곳은 서울 강남 한복판의 어느 고층 빌딩이었다. 약속시간 5분 전에 도착한 김부장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주차장에는 그가 어제 군침만 삼키며 중고차 사이트에서 훑어보던 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김부장도 나름 30년 대기업에서 일한 몸인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비해 너무 검소한 차를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김부장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약속 장소는 이 건물 30층이다. 꼭대기 층.
'여기 월세는 꽤 비쌀 텐데...'
이런 의리의리 한 건물에서 가장 전망 좋은 층을 통째로 빌려 상담실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자들이 구멍가게 하나 차려놓고 사기 치려는 좀도둑 무리는 아닌 듯했다. 김부장은 이런 겉모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가 살면서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처음 느낀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사람을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겉모습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해주는 지표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멋진 건물을 빌릴 정도의 회사라면 어느 정도는 믿을만한 회사일 것이라고 김부장은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김부장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유리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밀어보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김부장은 옆에 호출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물론 그의 머리 위에 달린 CCTV도 포함해서 말이다. 호출 버튼을 누르자 인터폰에서 친절한 여자 음성이 나온다.
"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 XX인데요."
'삑~!'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김부장은 다시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 또다시 유리로 된 방들이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방을 감싼 유리는 완전히 투명한 유리는 아니고 물결무늬가 들어가 있어서 방 안쪽은 대충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김부장은 방들이 늘어선 복도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방들 중의 하나에서 여자 직원이 나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 직원은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늘씬한 몸매에 키는 여자치고는 좀 큰 편이었고, 얼굴을 보니 나이는 대략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김 부장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자 여자는 상냥한 미소로 김부장을 맞이한다.
유리로 된 작은 방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만이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몇 가지와 전화기 한대가 전부였는데 김 부장이 먼저 자리에 앉자 책상 맞은편에 여자 직원이 앉으며 먼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김부장은 먼저 명함을 받았지만 선뜻 자신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좋은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경계심을 풀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을 딱 맞혀서 오셨네요. 오시는 길 힘드시지는 않으셨어요? 몇 가지 음료가 준비되어 있는데,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따뜻한 커피? 아니면 시원한 생과일 주스들도 있고요."
평소라면 그냥 사양했겠지만, 김부장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상당히 긴장을 했는지 심한 갈증을 느꼈다.
"혹시 그냥 물도 있나요?"
김부장은 자신이 음료 취향마저도 아직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있어도. 그냥 물은 없는데 어쩌죠? 하하."
별로 유쾌한 농담도 아닌데 상담원은 큰 소리로 웃었다.
"여기는 커피가 정말 훌륭해요. 한번 드셔 보세요."
김부장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 상담원은 전화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김부장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커피보다는 물이나 주스가 더 필요했지만, 딱히 그런 여자 직원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 직원은 먼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먼저 설명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좀 양해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는데요. 사실 저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좀 보안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상담 전에 비밀유지 각서에 서명을 좀 받고 있어요."
김부장은 여자 직원이 내민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여기서 듣고 알게 된 모든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발설을 해서는 안되며,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서도 안된다. 이를 어길 시에는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지급된 참가수당을 포함하여 이로 인해 발생한 회사의 손해 일체를 배상하여야 한다....
내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는데, 김부장은 반대로 어떤 일을 하길래 이리 조심을 하는지 호기심이 더 생겼다.
"어떤 대단한 걸 개발하시길래 이런 것까지...."
김부장은 받아 든 종이를 천천히 읽어가며, 너무 유난 떠는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아마 여기 서명하시고 설명을 들으시면 저희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실 거예요. 워낙 획기적인 상품이다 보니 이렇게 진행되는 부분 양해를 부탁드리고요. 대신 그만큼 저희가 참가해주시는 것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해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실 각서에 서명하시기 전에 말씀드리면 안 되는데요... 임상시험에 참여하시면 300만 원을 지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김부장은 흠칫 놀랐지만, 그의 속마음을 들킬까 봐 표정을 애써 숨겼다.
그는 중간까지만 읽은 비밀유지 각서에 곧바로 서명을 한 뒤, 각서를 여자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 임상시험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설명을 다 들으시고 원치 않으시면 참가하지 않으셔도 무방하고요. 그러시더라도 오늘 방문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교통비는 10만 원으로 지급해드리니깐요. 설명 끝까지 잘 들어주시길 부탁드려요.
저희는 항정신성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고요. 정식 명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저희는 편하게 이걸 '기억 주사'라고 불러요. 어릴 때 칭찬도 많이 받고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들일수록 사회성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나중에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은 아마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저희 치료제는 이런 부모의 사랑이나 칭찬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시면 돼요."
'기억 주사?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김부장은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여자 직원의 설명이 답답했지만, 일단 참고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우리 뇌에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해마' 바로 옆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바로 그 옆에는 '편도체'라는 것이 있어요. 이 '편도체'의 역할이 바로 사람의 감정을 결정하는 건데요. 저희 회사에서는 연구를 통해서 '해마'와 '편도체'가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러니깐 쉽게 말해서 사람의 감정이 바로 그 사람의 기억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죠."
여자 직원의 설명이 그럴듯했는지 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여자 직원은 자신감을 얻어 더욱 열성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좋은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좋은 기억이 많은 사람은 힘든 일이 있어도 잘 버티고 이겨낼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조그만 상처에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기억들도 사실은 기억만 못할 뿐이지 머릿속 해마에는 고스란히 그 정보가 남아있다고 해요. 그래서 한 번 각인된 나쁜 기억들은 영원히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죠. 반대로 기쁘고 따뜻했던 추억들은 우리가 좋은 감정을 느끼도록 해 주고, 어떤 충격에도 잘 견딜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주죠. 하지만 우리가 항상 좋은 기억만 갖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이번에 누군가의 좋은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그게 바로 '기억 주시'인 거죠. 기억 주사에는 인간의 해마에서 추출한 행복한 기억을 가진 세포들을 있어요. 그리고 이 기억 주사를 맞은 사람은 그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로 인해 우울증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계속해서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죠. 염려 마세요! 기억 주사를 맞는다고 해서 누군가의 기억 자체가 옮겨지는 것은 아니에요. 주입된 기억 세포들은 절대 새로운 기억이 되지는 못해요. 단지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돕기만 할 뿐이죠."
"그런데 어떻게 좋은 기억 세포만을 추출할 수 있죠?"
김 부장은 궁금한 부분을 바로 질문했다.
"사실 좋은 기억 세포만 선택적으로 추출해내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긴 해요. 그래서 저희는 3개월 미만의 영아들에게서만 기억 세포를 추출하고 있어요. 그 아기들은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품에서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들만 가진 채 자란 아이들이죠. 어떤 나쁜 추억도 없는 상태예요."
김부장은 여자 직원의 대답이 그리 믿음직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 딱히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돼요. 특별한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저희가 동물 실험을 통해서 다 검증을 한 상태이고요. 아기들의 상태는 정말 저희가 100% 보증을 하거든요."
"그럼 간단히 말하면,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의 기억 세포를 배양해서 그걸 저희 머릿속에 넣는다는 건가요?"
김부장은 지금까지 그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되물었다.
"네, 맞아요. 행복한 기억을 주사하는 거죠!"
여자 직원은 대답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임상시험 참가는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하나요?"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서 천천히 고민해보세요. 다음 주 수요일 전까지만 제가 드린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 주세요. 혹시 또 궁금하신 점 있으신가요?"
김부장은 몇 초간 가만히 정지해 있었다. 이곳에 와서 나눈 대화를 다시 되짚어본 뒤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은..."
"네, 그럼 천천히 고민해보시고요. 이건 오늘 상담에 응해주셔서 드리는 겁니다."
여자 직원은 김부장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네."
김부장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의 호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그리고 아까 서명하신 비밀유지 각서의 내용은 잊지 말아 주세요. 혹시나 불상사가 생기면 안 되니깐요."
말투는 상냥했지만, 나가서 입이라도 뻥긋한 날에는 나락으로 갈 수도 있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김부장은 유리로 된 방을 나선 후 왔던 길 그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