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칭의 중요성
절정 고수의 등장과 그의 가르침
내가 살았던 곳은 지어진지 대략 10년 정도가 지난 아파트였다. 뭐 특별한 흠결을 꼽기는 어렵지만, 새로 분양한 아파트들과 비교하면 조금 소박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외벽의 도색은 살짝 빛바래져 있었고, 공동현관 키패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눌렀는지 비밀번호 4자리가 처음 온 사람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닳고 닳아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항상 '끼익~' 하는 매끄럽지 못한 소리가 났는데,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복도와 계단 곳곳에 묻어있는 세월의 때는 이제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항상 다니는 아파트 헬스장도 이런 느낌이다. 들어서면 정면에 신발장을 가득 메운 운동화들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낡고 오래된 신발들은 매번 올 때마다 같은 자리이다. 아마도 주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잊은 지 꽤 오래일 것이다. 그리고 항상 들려오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음악들. 대략 10년 전쯤 히트했던 노래들 같은데, 아마 처음 이 헬스장이 오픈했을 때는 최신가요가 아니였을까? 헬스장 마루는 적갈색의 나무 무늬인데, 어릴 적 다녔던 학교 강당 바닥 같은 느낌이다. 깔끔하게 유지는 잘 되는 편이었지만, 좀 올드한 느낌을 지울수는 없다. 천정과 벽은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는데, 세월 탓인지 침침한 조명 탓인지 흰색보다는 베이지색에 가깝게 보였다. 운동기구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갖춘 정도. 월 만원으로 무제한 이용이 가능한 딱 그 정도의 시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주로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약간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많은 수는 아니어서 헬스장은 언제나 한산했다. 가끔 저녁시간에 사람들이 몰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운동기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만큼 붐비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낯설었던 이곳도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기 시작한 지 2달 반이 지났다. 이젠 너무나 익숙하다. 인사는 따로 하지 않지만, 항상 이곳을 오시는 분들은 밖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안면도 익혔고,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의 음악들은 순서까지 다 외울 정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못 보던 인물이 한 명 등장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목에 수건 한 장 걸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헬스장에 들어서는데, 어딘가 생소한 템포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마른 체구의 남자 한 명이 있었다. 호기심에 슬쩍 근처로 다가가 러닝머신에 표시된 기록을 곁눈질로 확인한 순간,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는 속도는 무려 시간당 15.6km였고, 그 속도로 이미 10km 이상의 거리를 뛰고 있었다. 달린 시간과 거리를 볼 때, 그 페이스를 유지한 것이 틀림없다. 이건 아마추어의 솜씨가 아니다. 만약 아마추어라면 거의 최상급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최상급 선수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것 아니야?
평소라면 대충 몸을 풀고 바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겠지만, 이 날은 쉽사리 러닝머신 위로 올라서지 못했다. 대신 다른 운동을 하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절정고수의 기록을 훔쳐봤다. 그는 내가 도착한 후에도 40분 정도를 더 달리더니 20km를 78분 만에 찍고 내려왔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하프코스를 80분 정도에 완주를 한 셈이다. 풀코스로 치면 2시간 40분. 바로 앞에서 펼쳐진 이 놀라운 광경은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이런 달리기 고수를 이런 허름한 아파트 헬스장에서 만날 줄이야. 물론 선수들의 기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sub-3(*sub-3 :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이내 (2시간대) 완주하는 것)를 아주 간단히 돌파하는 기록이다. sub-3가 어느 정도로 어려운 것이냐면,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마라톤 대회인 춘천, 동아 마라톤에서도 sub-3 기록을 달성하는 주자는 전체의 1~2% 수준이다. 달리기 좀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도 상위 1%에 속한다는 말이다.
나름 이 구역 '달리기 최고수'라는 자부심으로 헬스장에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던 나로서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결국 이 날은 러닝머신에 발도 올려보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트린채 잔뜩 주눅이 들어 집에 돌아와야 했다.
며칠 후 또다시 절정고수가 나타났다. 그날은 내가 먼저 헬스장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유심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매우 마른 체형이었다. 옹골진 종아리 근육에서는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상체는 근육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각 잡힌 어깨와 딱 벌어진 등이 아주 다부져 보였다. 어쩌다 그냥 한 번 들른 것은 아닌가보다. 새로 이사를 왔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운동하는 곳이 바뀐 것일지도. 어쨌든 이 아파트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1시간 이상 그리고 10km 이상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자부했는데, 더 이상은 아니다. 조그만 헬스장에서나마 2인자로 물러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긴 하나, 절정고수의 등장은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정도 되는 달리기 고수는 도대체 어떻게 훈련을 할까?'
그의 행동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앞에 서서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 헬스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아령을 드는 척하며 거울을 통해 힐끔힐끔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먼저 스트레칭으로 시작한다.
'역시! 스트레칭이 중요한 것이었군!'
그런데 어찌나 몸이 유연한지 다리는 체조선수처럼 길게 찢어지고, 팔은 요가하는 사람처럼 마구 돌아간다. 저 정도의 유연성을 가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하는 걸까? 그저 탄복만 나올 뿐이다. 스트레칭부터 뭔가 월등한 차이를 보여주는 절정고수는 러닝은 하지 않고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달리기는 안 하려나?'
내심 지난번처럼 월등한 달리기 실력을 보여주길 기대했지만, 그의 운동은 차분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루틴이 웨이트 1세트 다음에 스트레칭 1세트이다. 스트레칭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러닝머신 위에 올라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잔뜩 기대에 차 있었지만 그는 시간당 12km 속도로 5km 정도만 가볍게 달리더니 휙 헬스장을 나가버렸다. 그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나는 그가 했던 스트레칭과 근력운동 동작들을 따라해보았다. 나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저렇게 달릴 수 있는 날이 올까? 그의 능력을 단박에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배운 것 같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