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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May 25. 2024

감정의 세계 #2

탄생

내가 태어난 곳은 따스한 '점액'의 바다였다. 선홍색 장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점액은 우리들에게 집이고, 식량이고, 놀이터이다. 점액은 우리를 항시 위협하는 면역세포와 항생제로부터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순간에는 일용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바로 '점액'인데, 천만다행으로 난 아주 질 좋은 점액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아주 건강한 '장'속에서 태어나 아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 깊은 잠에 빠지는 새벽녁이 되면 항상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장 속의 여기저리를 돌아다니며, 장벽의 깊은 주름 속 남아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한가로인 점액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둥실둥실 떠다니며 놀기도 했다. 한동안은 면역세포들의 침입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밤새도록 여유롭게 맛보고, 즐기며 장 속의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인간이 잠에서 깨어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면 우리들은 '기쁨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모두 모였다.


"기쁨의 나무"


기쁨의 나무는 우리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다. 우리에게 기쁨의 나무는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이다. 우리들은 대게 백여세대가 모여서 한 부락을 이루는데 모든 부락의 한가운데는 '기쁨의 나무'가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기쁨의 나무'가 있는 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이겠지만. 그리고 각 부락에는 제사를 담당하는 우두머리가 하나씩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밤새도록 먹고 즐기다가 마지막에는 모두 '기쁨의 나무'에 모여 의식을 치렀다. 제사장을 필두로 우리는 '기쁨의 나무' 곁에 둥그렇게 둘러앉은 다음 서로가 서로의 몸을 이어 기다란 고리를 만들었다. 그 다음 각자 몸에 흐르는 작은 전류를 기쁨이 나무를 향해 전달하면 우리의 에너지가 모여 기쁨의 나무는 환하게 밝혀졌다. 우리는 이 의식을 통해 인간과 간접적으로나마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리가 행하는 의식은 인간에게 '기쁨'이 되어 그들을 더욱 열심히 살게 해주었다. 그들은 '기쁨'의 에너지를 받아 더욱 잘 먹고, 더욱 열심히 운동했고 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곳의 점액은 비옥해지고, 풍부한 영양소가 담긴 음식물들은 끊임없이 내려왔다. 그러다보니 '기쁨의 나무'를 중심으로 부락들은 장 속에 여기저기 융성하여 어린 나로서는 도데체 얼마나 많은 부락들이 이 곳에 있는지 가늠할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부락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 갑자기 그 일은 일어났다. 내가 엄마와 아빠의 몸을 조금씩 이어받아 새롭게 태어난지 몇 개월 뒤였을 것이다. 사방이 고요했던 그날 밤, 장 속이 갑자기 크게 요동을 쳤다. 다들 처음에는 인간이 악몽 때문에 몸을 심하게 움직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은 인간이 깨어나려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어서 '기쁨의 나무'로 모이자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심장의 박동은 여전히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다시 사방은 고요해지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날의 새벽 소풍은 다시 이어질수 있었지만, 이후 이런일들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자주 그리고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제사장은 우리들이 '기쁨의 나무'의식을 위해 모였을 때, 중대한 일이 생겼다며 우리들 모두 '기쁨의 나무'에 가까이 오라한 뒤 '기쁨의 나무' 옆을 가르켰다. 그 곳에는 아주 작지만 분명 또 하나의 '기쁨의 나무'가 있었다. 제사장은 말했다. 


"이건 또 하나의 기쁨의 나무입니다."


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왜 기쁨의 나무가 하나 더 생겨난거지? 기쁨의 나무는 장 속 여기저기에 있기는 하지만 바로 옆자리에 생기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기쁨의 나무가 새로 생겨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란 말이다. 더군다나 새로 생겨난 기쁨의 나무는 원래있던 나무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 마을마다 기쁨의 나무는 잔가지의 형태는 다르지만 대략의 모양새는 거의 비슷한데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나무가 무엇을 의마하는지 곧 알게 되었다. 그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인간의 몸 속엔 또 다른 생명체가 발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장 근처에 터를 잡고 지금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 새로운 생명의 몸부림에 우리는 지진같은 울림을 느꼈던 것이고, 어느샌가 이 생명은 점점 자라나 기쁨의 나무를 우리 마을까지 뻗친 것이다. 그래! 그러니깐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인간은 '임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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