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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Jun 02. 2024

감정의 세계 #3

이주

모든 일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그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것은 단지 장 속을 흔들어 우리의 단잠을 깨우는 그런 단순한 종류의 불편함이 아니다.

 

우리들의 세계에는 거역할 수 없는 불문율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머물고 있는 생명체에게 새 생명이 생기면 그곳으로 선택받은 자는 이주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정하는 것은 바로 새로 생겨난 생명체이다. 


배 속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얼마 전, 마을의 장로 어르신은 우리 모두를 불러모으셨다. 드디어 날이 것이다. 생명에게 넘어갈 이주자를 정하는 바로 그날! 

우리 모두는 새로 생겨난 아직 보잘 것 없는 새로운 기쁨의 나무 앞에 한 줄로 늘어섰다. 그리고 차례차례 기쁨의 나무에게 전기를 흘려보냈다. 만일 흘려보낸 전기에 화답하여 기쁨의 나무가 환한 빛을 발한다면, 그가 바로 선택된 자이다. 모두 긴장된 마음으로 차례차례 전기를 흘려보냈지만, 아무도 기쁨의 나무의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아무도 선택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나는 이런 어리석은 궁금중을 잠시 가졌었지만, 그건 아주 부질없는 짓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나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는데, 그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기쁨의 나무가 나의 전류에 환한 빛으로 응답한 것이다.


'왜? 왜? 왜 나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수많은 동료들 중에서 나여야 하지? 가장 어린 내가 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거지?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엄마, 아빠와 떨어지는 것도 싫다고! 정든 이 마을의 안락한 삶과 떨어지는 것도 너무 싫다고!'


하지만 아무도 기쁨의 나무의 결정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마을의 장로님도 그냥 나의 처지를 위로할 뿐, 결정을 되돌리려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나는 이 안락한 삶과 영원히 작별할 채비를 마치고, 먼 길을 떠났다. 새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전 나는 장의 가장자리 절벽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곳에서 대기하다 새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새로운 몸으로 넘어가야 한다. 

아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장 속에는 연일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점액의 바다의 거대한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성이 나 있었다. 거친 심장의 박동을 이겨내지 못한 핏줄들에서는 검붉은 핏덩이들이 뿜어져 나왔는데, 이 용암같은 핏덩이를 피하지 못한다면 우리 몸은 그 자리에서 바로 녹아버릴 것이다. 물론 사방에서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수많은 혈소판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처럼 보였다. 이런 시기는 백혈구들도 조심해야한다. 주인의 몸이 위기라고 느낀 백혈구들은 평소보다 2배 이상 정찰인력과 전투인력을 생산해 몸을 샅샅이 뒤져가며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는 것들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마니깐.


그런 연유로 나는 점액의 바다 아래 장의 가장 깊은 골을 따라 아주 조금씩 이동했다. 몸을 바싹 낮추고 천천히 움직이다보니 이동은 더딜 수 밖에 없었고, 이러다가 예정된 시간 안에 장의 가장자리 절벽까지 도착하지 못할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걱정는 곧 현실이 되었다. 거대한 소음과 진동이 동시에 땅을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장의 공간이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짓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자궁의 문이 열렸구나!'


시간이 없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넘어가지 못한다면, 이주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영원히 장 속에서의 안락한 삶은 없다. 이주에 실패한자는 영원히 공기 중에 떠돌다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는 참혹한 죽음을 맡게 된다. 그게 바로 선택받은 자의 숙명이다.

다급하다. 아직 장의 가장자리 절벽까지 갈려면 반나절은 더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몇 분안에 새 생명은 바깥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 순간 난 내 머리 위를 강하게 스치는 폭풍을 느꼈다. 좁아진 장속의 공간을 따라 응축된 공기가 강한 폭풍이 되어 밖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건 마지막 기회야!'


다시 한번 땅이 요동치고, 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강한 폭풍이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거대한 울림과 함께 강렬한 바람이 밀려왔다. 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폭풍을 향해 솟구쳐 뛰어올랐다. 그리고 나의 무모한 도박은 성공이었다. 장 속의 강렬한 폭풍은 나를 한 순간에 세상 밖으로 밀어냈고, 곧바로 아이의 얼굴 근처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난 예기치않게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아주 동그랗게 말아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한채, 자연스런 중력의 흐름을 따라서 살포시의 아이의 콧잔등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서둘러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사정없이 퍼붓는 소독약 세례를 막고 우리 몸은 흔적도 없이 부식해버릴 것이다. 


'콧구멍을 찾아야 해!'


그리고 곧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코로 내뿜는 강한 숨소리는 콧구명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난 사력을 다해 콧구명을 향해 달렸다. 작은 몸을 연신 꿈틀거리며 콧구멍을 향해 돌진했고, 콧구멍 속으로 몸을 숨긴지 얼마되지 않아, 아이의 피부는 소독약과 강한 알칼리 계면활성제로 뒤범벅이 되어버렸다. 자칫 조금이라도 지체되었거나, 내가 콧구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면 지금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난 새 인간의 몸에 넘어올 수 었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행운이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선택받은 자 중에서 대부분 아니 99% 이상이 공기 중에 휩쓸려 떠내려가거나 운 좋게 아이의 몸에 착륙하더라도 소독약과 알칼리 계면활성제로 인해 그 자리에서 바로 산화해버렸다. 


그러니 이제 이주에 성공한 우리는 황무지 같은 생명의 몸에 새롭게 보금자리를 일구고 다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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