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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Jun 07. 2024

감정의 세계 #4

동행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폐로 호흡하는게 익숙치 않아서인지 불규칙하고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몸을 바짝 엎드렸지만 아직 점막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콧속에서는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제 겨우 아기의 몸 속에 도착했으니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얼마되지 않는 점액을 모아 간신히 부여잡고 폭풍과도 같은 호흡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다행히 안간 힘을 쓰며 버티는 사이 아기의 숨은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덕분에 나도 온몸을 짖누르던 긴장 속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지만, 죽다 살아날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서인지 극도의 피로감을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걸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폭풍 같은 호흡은 완전히 멎은 상태였고, 주변은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는 콧속이지!'

콧구멍은 인간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가장 큰 관문 중에 하나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온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아기의 콧속이지만 벌써부터 다양한 미생물들로 아주 시끌시끌하다. 대부분 공기 중에 떠돌던 뜨내기 미생물들처럼 보이기는 했는데, 아직 면역세포들이 입구를 지키지 않는 틈을 타 얼른 몸 속에 들어가려 아우성이다. 저렇게 난리를 쳐봐야 곧 면역세포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산산조각 날 운명인줄도 모르고... 


"이봐! 너 혹시 인간에 대해서 잘 아니?"


얄팍한 점액 밖으로 고개만 살짝 빼고 부산한 콧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슬쩍 뒤돌아보니 나랑 생김새는 얼추 비슷한데 왠지 자아내는 분위기는 많이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어,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에 인간 몸에 있다가 와서 대충은.... 그런데 왜?"


"아 그래! 잘 됐네. 난 심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혹시 길을 좀 아나해서.."

"심장! 그것도 몰라? 그냥 아무 핏줄이나 타고 가. 그냥 큰 길만 따라가면 무조건 심장에 도착할 수 밖에 없다고!"

"아 그래. 간단해서 좋네. 고마워."

"근데 넌 누구야?"

"나?"


"난 '슬픔'이라고 하는데..."


'슬픔?!'

슬픔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살았던 장 속에는 '슬픔'이 살지 않았다. 슬픔은 심장 근처에서 모여 사는데, 평상시에도 한번 잠들면 일어나지 않는 아주 게으름뱅이로 유명한 종족이다. 심하게 게으른 녀석 중에는 몇십년동안 한번도 깨지 않는 녀석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게으름은 다른 감정들에게는 축복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반대의 상황이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나무'는 여러 감정의 나무 중 가장 크고 거대하다. 인간의 심장 근처에서 자라는데, 딱 한 그루만 자라난다. 근데 이 한 그루의 존재감은 어마무시해서 다른 어떤 존재와도 비교불가하다. 그 뿌리는 인간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가 내뿜는 아우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슬픔의 나무'가 활동을 시작하면 조그마한 '기쁨의 나무'들은 금새 말라비틀어져 고사해버리고, 그나마 조금 큰 '기쁨의 나무'들도 생명력을 잃고 시들시들해진다. 다행히 내가 전에 살던 곳에서는 가끔 '슬픔의 나무'의 힘이 전해진 적은 있었지만, 오래지않아 모두 잦아들었기에 그런 재앙같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을의 장로님은 항상 '슬픔의 나무'를 자극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아 반가워! 난 '기쁨'이라고 하는데 혹시 나도 장까지 가야하는데 같이 핏줄타는 곳까지 갈래?"

"어 정말? 그러면 난 좋지. 안 그래도 어디서 핏줄을 타야할지 몰라서 걱정하고 있었거든.."


비록 나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먼 길을 함께할 동료가 생겼다는 생각은 많은 위안을 주었다.


"넌 어디서 왔어?"

콧구멍을 지난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내가 먼저 '슬픔'에게 질문했다.


"난 바다에서 태어났어. 줄곧 바다에서 살다가 지나가는 새에 한번 올라탔는데, 그 뒤에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 여기까지 흘러왔네. 난 인간의 몸은 처음인데, 넌 많이 겪어봤어?"

"난 인간의 몸 속에서 태어났어! 넌 인간의 몸이 처음이구나. 여긴 정말 아늑하고 좋은 곳이야. 물론 아기라서 처음에는 고생 좀 하겠지만, 그래도 터만 잘 닦아두면 꽤 괜찮은 곳이 될거야."

"그래. 정말 이제는 편안히 살고 싶다. 떠돌아다니는건 너무 피곤하다고. 빨리 심장에 도착한 다음에 잠이나 자고 싶어."


'벌써부터 잘 궁리를 하다니... 역시 '슬픔'이다..'


우리는 목에서 기도를 따라 폐로 내려갔다. 폐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핏줄을 타야한다. 입이나 코로 들어온 미생물들에게 폐는 일종의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그래서 다들 일단 폐로 이동하고 여기서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슬픔은 심장에서 내리고 난 거기서 장으로 내려가는 동맥으로 갈아타야 한다. 

폐에서 심장으로 가는 정맥을 기다리는 사이, 난 '슬픔의 나무'에 대해서 물어봤다.


"넌 아직 '슬픔의 나무'를 본 적은 없겠네?"

"맞아. 난 아직 본적이 없어. 그래도 엄마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난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엄마하고 아빠는 모두 인간의 몸에서 꽤 오래 살았거든. 그래서 사실 난 좀 두려워. 엄마, 아빠가 늘 나한테 말했거든. '슬픔의 나무'가 절대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슬픔의 나무'를 지키지 못하면 절대 그 '인간'을 지킬 수 없다고."

"그래? 난 '슬픔의 나무'는 엄청 크고 튼튼한줄 알았는데..."

"나도 자세한건 모르겠어. 하지만, 엄마는 항상 나한테 반드시 '슬픔의 나무'를 지켜야 한다고만 했어.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되는건지 그게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어. '슬픔의 나무'를 다들 싫어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슬픔의 나무' 근처에도 오지 않잖아."

"맞아. 우리 장로님도 나한테 항상 신신당부하셨지. 절대 '슬픔의 나무'를 자극해서는 안된다고..."

"그래. 아무튼 나도 아직 '슬픔의 나무'를 겪어본 적이 없으니, 그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뭐 가서 겪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여기까지가 내가 '슬픔'과 나눈 대화이다. 우리는 곧이어 정맥으로 뛰어들었고, '슬픔'은 심장 그리고 나는 장 속으로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위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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