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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Jul 11. 2024

감정의 세계 #8

분노에 대한 오해

위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 난 이 모든 일이 '분노'의 탓일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날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얼마나 지랄염병을 했길래 이 난리를 치게 만드는거야?"

평온했던 나의 일상을 '분노'로 인해 침해받고, 이 개고생을 시킨 장본인이 그 녀석이라고 확신하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벼르고 위에 도착했는데, 주변의 광경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위액이 용암처럼 치솟고, 사방에서 음식물을 녹이느라 분주할 법한 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위액은 거의 말라서 바닥에 아주 조금 고여있는 정도였는데, 그나마조차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 텅빈 공간 속은 우리 두 미생물의 발자국 소리가 느껴질만큼 고요했고 차분했다.


'여기가 정녕 위가 맞는걸까?'


고요함은 우리를 오히려 더 섬뜩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여기는 우리의 원흉 '분노'들이 사는 곳이고, 우리는 그들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둘러 '분노'를 찾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렵지않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벽을 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또 난장을 피우려고 하는게 뻔했다. 우리는 냉큼 그들에게 달려갔다.


"이봐요. 어서 멈춰요!"

다급한 우리의 부름을 듣고 '분노'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난리가 났다고요. 당신들 때문에 모든 감정들이 떼죽음을 당할 지경이에요. 당장 이 아이를 자극하는 일을 멈추란 말에요!"

다짜고짜 쏟아내는 우리의 말이 전혀 이해가 안가는 듯 분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지금 아래에 있는 우리 '감정의 나무'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이에요? 난리가 났다고요. 전부 봉인되어버렸어요. 융털의 숲은 빛을 잃었고, 점액은 점점 말라만 간다고요! 이러다가 우리 모두 죽고 말거에요!"

"그러니깐 내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당신이 말하는 이상한 일은 지금 여기도 벌어지고 있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보세요. 지금 이 곳을. 여기가 당신이 아는 위 속이 맞나요? 어느 날부턴가 음식물이 넘어오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위벽은 바위처럼 딱딱해졌고, 위액은 모두 말라서 이제 바닥이 드러났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요. 아니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우리들의 감정의 나무도 모두 봉인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요. 당신은 도대체 뭔데 그런 말을 지껄이는겁니까!"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의 이 일들이 '분노'때문에 생겼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불안'이 '분노'가 그랬을거라 추측을 했고, 그 추측이 씨앗이 되어 난 그들의 책임을 확신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 제가 오해했다면 죄송해요. 전 단지... 상황이 좀 급했고..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튼 당신을 오해한건 정말 미안해요..."

"이보세요! 당신 저 밑에 있는 녀석들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인데, 그건 정말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들은 우리 때문에 위액이 넘치고 난리가 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라고요. 우리는 아무리 감정의 나무와 소통하고 싶어도 참는다고요. 그러다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때만 감정의 나무와 소통을 한다고요. 우리를 통해서 화를 뿜어내지 않으면 아마 엄청난 난리가 날걸요. 위액은 끓어넘쳐서 아래 있는 마을들을 모두 집어삼킬거고요. 우리가 그나마 화를 다른 곳으로 뿜어내도록 감정의 나무와 소통을 하니깐 일이 그 정도로 끝나는줄도 모르고... 이 지옥같은 곳에서 위벽에 겨우 들러붙어 사는 우리들 덕분에 자기들이 융털 속에 숨어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체 맨날 우리 탓만 하고 있죠."


'분노'의 진정어린 항변에 나는 몸들바를 모르게 부끄러웠다.

"미안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당신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줄도..."


"그나저나 당신들은 어디에서 온거에요? 그 쪽도 감정의 나무들이 전부 봉인되었단 말이에요?"

"네. 맞아요. 우리는 대장에서 건너온 '기쁨'이에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감정의 나무가 봉인되었어요."

"그럼 감정의 나무가 봉인된 거는 우리랑 시기가 거의 비슷하네요. 근데 이상한 일은 그 전부터 있었어요. 당신들도 보다시피 음식물이 넘어오지 않아요. 가끔 침들만 조금씩 흘러내릴 뿐이죠. 꽤 오래 되었어요. 그러면서 위벽은 단단해지고 얼음처러 차가워졌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위벽을 자극해서 여기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지금 위벽은 상채기 하나 나지 않을만큼 차갑고 단단해져 버렸어요. 혹시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뭐 짚이는 거 없었나요?"

"전 그저 당신들 때문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헐레벌떡 찾아온거죠. 아마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겠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떠나볼게요."


결국 위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다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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