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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카가 쏳아올린 소금빵(1)

문명에서 혁명까지, 빵이 만든 역사 - 그리고 2025년 성수동의 실험

by 송지

2025년 8월 30일 서울 성수동에 특별한 팝업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990원짜리 소금빵을 사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이는 '싼 빵'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폭발한 결과였다. 이 팝업스토어의 주인공은 경제유튜버 슈카였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빵이 간식이나 디저트에서 식사 대용으로 전환되며 소비 빈도와 지출 체감이 커졌다. 이로 인해 가격 상승의 소비자 체감도가 더욱 높아졌고, '빵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 용어는 2020년을 기점으로 언론과 대중에게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슈카는 자신의 채널에 '대한민국 밀수입 비중 99.5%, 빵 터질 빵값'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에서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전 세계적인 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해 한국의 빵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10년 사이에 빵값이 10배 올랐다'는 주장을 펴 논쟁이 이어졌다.

이후 그는 생산 원가와 유통 구조의 비효율성 때문에 빵값이 비싸졌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팝업스토어를 기획했다. 하지만 빵집이 화제가 되자,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는 "990원으로는 절대 빵을 팔 수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일반 빵집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비쳐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였다.

논란이 커지자 슈카는 직접 영상과 SNS를 통해 "자영업자를 비난할 의도가 아니었다"라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팝업스토어는 예상치 못한 논란과 현장 혼잡 문제로 인해 9월 7일부로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빵

슈카가 제기한 빵값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빵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빵은 인류에게 고대부터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인류 역사에서 빵은 자급자족 사회의 상징이자,
야만적인 유랑민과 대조되는 정착 생활의 상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시인으로, 서양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메로스는《오디세이아》에서 '빵을 먹는 인간'을 야만적인 존재들과 대비시켰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는 농사를 짓지 않고, 빵을 먹지 않으며, 사람을 포함한 날것을 먹는다. 빵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문명사회의 규칙과 질서 밖에 있는,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호메로스는 "빵 먹는 인간이 문명인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빵을 문명과 동일시했다. 이렇게 빵은 고대부터 단순한 음식을 넘어 문명의 척도였고,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상징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그렇기에 역사 속에서 빵은 정치, 사회, 경제 분야의 굵직한 사건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왔다.

로마 제국의 빵과 정치

빵이 정치체제의 변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가 고대 로마다.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인간은 만족한다'는 말은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의 정치 현실을 풍자한 표현이다. 로마 정부는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상 빵 배급과 오락 제공(서커스)을 실시했다.

전쟁이 잦았던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시민들이 전쟁에 참여한 때를 틈타 토지를 사들였다. 전쟁이 끝나면 중소 자영농이던 시민들은 토지를 잃고 무산자 계층이 되었다. 귀족들은 토지를 독점하고 토지를 분배하라는 황제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대규모 폭동이나 정치불안이 발생해 통치자의 교체, 개혁, 지방 정복 같은 큰 변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땅대신 빵을 나누어주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엄청난 수의 시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효율적이고 대량으로 음식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특히 빵은 로마 시민의 주식이었기 때문에, 매일 막대한 양의 빵을 공급해야 했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은 좁고 화재에 취약한 다층 공동 주택인 인술라(insulae)에 살았다. 이 인술라에는 현대식 주방이나 빵을 구울 수 있는 화덕이 없거나 매우 부족했다. 따라서 많은 시민은 직접 빵을 굽는 대신, 전문 빵집에서 빵을 사 먹어야 했다.

이 시기 로마에는 빵집이 300개가 넘었고 제빵사들은 로마의 국가공무원이었다. 빵 배급 정책은 로마가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빵은 단순한 식료품이 아니라
정치적 안정을 위한 필수 요소였던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빵의 혁명적 힘

빵값으로 인해 불거진 또 다른 세계사의 큰 사건이 있다. 바로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는 빵값 상승과 빵의 품질·공급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됐다.

옛날부터 빵은 프랑스 왕정의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7세기 경 다고베르트 1세는 빵 가격을 통제한 최초의 국왕이었다. 빵은 민중들의 폭동을 막는데 필수적인 '공공 서비스'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빵집 주인은 '국가의 공복'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구제도 하에서는 경찰이 빵의 생산과 소비의 모든 과정을 일일이 단속했다.

1787년과 1788년의 흉작에 이어 1789년 초의 이상 한파 때문에 강물이 다 얼어붙어서 식량 수송이 중단되고 또 물레방아가 움직이지 못해서 밀을 빻지도 못했다. 그 해 겨우내, 봄내 식량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789년 마침내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빵을 달라"라며 생존권과 평등한 식사의 권리를 외치며 항쟁에 나섰고, 이는 루이 16세(1793년 1월 21일 처형)와 마리 앙투아네트(1793년 10월 16일 처형) 등 왕정 붕괴로 이어졌다.

1793년 혁명 정부는 '최고가격제'를 시행하여 빵을 포함한 생필품 가격을 고정하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1793년 11월 15일 이른바 '평등의 빵'이 제정되었다.


호밀이 3/5, 밀이 2/5의 비율로 배합된 이 평등빵의
규격과 무게, 가격 등은
모두 행정 당국에 의해 천편일률적으로 정해졌고,
어디에서나 똑같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이 평등빵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은 '평등빵'이 바게트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게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혁명 정부는 평등빵의 길이를 80cm, 무게를 300g으로 정했는데, 이는 바게트가 길쭉한 형태와 규격화된 무게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바게트처럼 가늘고 길쭉한 형태의 빵은 둥근 빵보다 훨씬 빨리 구울 수 있어, 모든 시민에게 신선한 빵을 빠르게 공급해야 했던 혁명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했을 것이다.

'바게트'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지만, 그 형태와 철학은 프랑스 혁명기의 '평등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바게트는 보편화되었고, 1980년대까지도 빵 가격은 법령으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도 바게트는 길이 55~70cm, 무게 250~300g가 바게트 대회의 심사 규격이다. 이 대회 우승자는 일 년간 공식 엘리제 궁전 바게트 납품업자로 지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이 빵은 아직도 프랑스 전역에서 초당 320개가 팔린다는 프랑스 문화의 상징이다.



역사 속에서 빵은 분명 정치와 사회를 뒤흔든 강력한 힘이었다.


슈카의 빵집은 짧은 기간 안에 문을 닫았지만, 그가 제기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슈카의 해명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논리에는 몇 가지 간과된 지점들이 있다. 다음 글에서는 빵값 논란에 대해 그가 밝힌 해명을 중심으로 과연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지 밝혀보도록 하겠다.


출처 : 교양인이 알아야 할 음식의 역사, 음식 경제사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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