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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다이닝 탄생기

럭셔리 호텔에서 미식까지

by 송지

2016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 첫 발간과 함께 한식당 '가온'과 '라연'이 동시에 미슐랭 3 스타를 받으며 한국 최초의 3 스타 레스토랑이 탄생했다. 하지만 첫 발간부터 특정 레스토랑에 대한 특혜 의혹과 정부 지원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쉐린 가이드는 이후 한국 미식 시장의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가온'과 '라연'이 장기간 3 스타를 유지했지만, 2023년 '모수'가 3 스타에 합류하면서 한국 파인다이닝 업계의 변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가온'이 폐업하고 '라연'이 강등되는 등 기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의 등급에 큰 변화가 생기며 논란이 이어졌다. 2025년에는 '밍글스'가 새롭게 3 스타에 선정되었고, '모수'의 영업 중단으로 현재는 밍글스가 한국의 유일한 3 스타 레스토랑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완전히 새로운 소비층의 등장이 있었다. 국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주요 객층도 과거 법인카드를 사용하던 중장년층과 달리, 개인의 경험과 가치를 중시하는 MZ세대가 핵심 소비층으로 떠올랐다.

MZ세대는 가치를 두는 경험에는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들은 파인다이닝에서의 경험을 단순히 식사가 아니라
셰프의 철학이 담긴 예술 작품을 경험하고,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행위로 인식한다.
또한, 그들에게 파인다이닝은
고가의 명품 대신 적은 비용으로 만족감을 주는
'작은 사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30대 고객의 결제 비중이 40-50대 고객의 두 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MZ세대가 파인다이닝 시장의 새로운 큰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이 모든 현상들—미슐랭 가이드의 권위, 파인다이닝을 예술로 바라보는 시선, 특별한 경험으로서의 외식 문화—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누리는 외식 문화, 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즐기며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경험은 사실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결과물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음식을 미식(美食)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와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는지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부르주아 요리의 등장과 레스토랑의 탄생

17세기와 18세기 초, 화려한 요리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만찬처럼 음식은 권력의 언어였고, 일반 시민은 접근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변하면서 도시 상공업이 발달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했다. 이들은 귀족처럼 성대한 연회를 열 수는 없었지만, 품격 있는 음식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었다. 1746년, '부르주아 요리'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계절과 지역 재료를 활용한 실용적인 요리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음식은 더 이상 왕의 전유물이 아닌, '맛을 즐기는 권리'라는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765년 파리에서 최초의 레스토랑이 탄생했다. 한 카페 주인이 '몸을 회복하는 수프'를 팔며 자신의 가게를 레스토랑(Restaurer)이라 불렀고, '회복하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곧 좋은 음식을 파는 공간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레스토랑 중 하나인 르 프로코프(Le Procope)는 단순한 식당을 넘어 계몽사상가들의 토론장이 되었으며, 음식은 사유와 대화, 그리고 혁명의 촉매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실직한 귀족 가문의 요리사들이 도시로 나와
레스토랑을 열면서 귀족의 코스 요리는 비로소 시민의 식탁으로 확장되었다.
18세기말 파리에는 100개가 넘는 레스토랑이 있었고,
이는 곧 "평등한 미식의 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호텔과 파인다이닝의 결합

19세기에는 여행 문화의 확산과 함께 파인다이닝이 더욱 진화했다. 유럽과 미국의 신흥 부유층은 귀족처럼 집에 전문 요리사를 두지는 못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미식을 추구하고, 이를 사교와 비즈니스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19세기말 초호화 호텔인 **'팔라스(palace)'**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레스토랑은 여행과 결합된 새로운 미식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파인다이닝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정에서 럭셔리 호텔의 등장은 주요한 계기다. 오늘날 우리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경험하는 평범한 식사는 사실 수백 년에 걸친 역사와 혁신이 만든 결과물이다.

음식은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했고, 호텔과 레스토랑은 단순한 산업을 넘어 문화를 담는 무대가 되었다. 이 무대를 완성한 중심에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세자르 리츠다.

세자르 리츠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세자르 리츠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 현대 파인다이닝의 아버지들

세자르 리츠는 가난한 소년 시절부터 호텔에서 일하며 경영을 배웠다. 그는 1880년대 트루베이에서 호텔 운영에 실패하며 훌륭한 요리사가 없는 호텔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최고의 호텔은 반드시 최고의 셰프와 함께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그가 만난 인물이 바로 '주방의 나폴레옹'이라 불린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였다. 에스코피에는 군대처럼 주방을 조직화한 브리게이드 시스템을 도입해 요리의 과학화를 이뤘는데, 이는 주방을 소스, 어패류, 디저트 담당 등으로 세분화하여 대규모 호텔에서도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한 혁신이었다. 그는 《Le Guide Culinaire》라는 요리서를 펴내 프랑스 요리를 표준화했다.

1880년대 후반 몬테카를로에서 두 사람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리츠가 공간과 서비스로 손님을 매혹하면, 에스코피에는 완벽한 요리로 감동을 더했다. 1898년 파리 방돔 광장에 리츠 호텔이 문을 열었을 때, 이곳은 엘리베이터, 욕실, 전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설을 갖추고 상류층과 예술가들이 모두 모이는 사교의 무대가 되었다. "파리의 계절은 리츠에서 시작해 리츠에서 끝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리츠 호텔의 레스토랑은 단순한 식사 공간이 아닌, 사교계의 중심지였으며, 에스코피에는 이곳에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피치 멜바와 크레이프 수제트 같은 혁신적인 메뉴들을 선보였다. 코코 샤넬,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곳의 주요 고객이었다.


이들의 협력은 호텔과 파인다이닝을 단순한 숙박과 식사가 아닌,
하나의 브랜드 경험으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의 럭셔리 호텔과 미슐랭 레스토랑 문화의 토대는
바로 이들의 협력에서 시작되었다.
피치 멜바와 크레이프 수제

20세기 이후 파인다이닝의 진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가 클래식 프랑스 요리의 기틀을 다진 이후, 파인다이닝은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계속 진화했다. 20세기 중반, 파인다이닝은 에스코피에의 무겁고 화려한 소스 중심 요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960~70년대에 등장한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 운동이 그 시작이었다.

누벨 퀴진은 버터와 크림을 듬뿍 사용하던 전통 요리법에서 벗어나, 신선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셰프들은 재료를 가볍게 익히고 소스를 단순화하여, 요리를 더욱 건강하고 깔끔하게 만들었다. 정형화된 레시피를 따르기보다 셰프 개인의 창의성과 재료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요리는 단순한 기능이 아닌, 셰프의 철학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파인다이닝은 과학과 자연, 그리고 지역 문화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분자요리 (Molecular Gastronomy)는 스페인의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를 중심으로 시작된 요리에 과학적 원리를 도입한 혁신이다. 액체 질소, 수비드, 거품(Foam) 기법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음식의 질감과 형태를 완전히 바꾸는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공했다.

2010년대 이후, 덴마크의 '노마(Noma)' 같은 레스토랑이 주도한 '뉴 노르딕 퀴진(New Nordic Cuisine)'은 파인다이닝의 또 다른 흐름을 만들었다. 셰프들은 지역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 심지어 직접 채취한 야생 재료까지 활용하며 지속가능성과 자연의 순환이라는 '팜투테이블(Farm to Table)의 철학'을 요리에 담아냈다.

이 모든 변화를 거치며 셰프는 단순한 요리사를 넘어, 미식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페란 아드리안과 르네 레드제피
넷플릭스 등 미디어를 통해 셰프들의 철학과 스토리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하나의 경험과 스토리를 판매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국 파인다이닝의 여정: 호텔에서 독립으로

이러한 전 세계적인 파인다이닝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한국에서도 독특한 미식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초기 한국의 파인다이닝은 대부분 특급 호텔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70~80년대에는 경제 성장과 함께 주요 호텔에 고급 양식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지만, 주로 고위층이나 기업의 비즈니스 목적으로 이용되는 폐쇄적인 문화였다. 일반 대중에게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특별한 날에만 찾는 '외식의 끝판왕' 같은 개념이었다. 이 시기의 파인다이닝은 요리사의 개성보다는 정통 프랑스 요리 등 서구의 방식을 엄격하게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는 한국 파인다이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다. 기존의 파인다이닝은 대기업이나 호텔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주를 이루었고, 고객층 역시 법인 카드를 사용하는 중장년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해외에서 선진 요리 기술과 철학을 배우고 돌아온 젊은 셰프들이 서울 강남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립 레스토랑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텔의 틀에 갇히지 않고 셰프의 개성과 창의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언론과 미식가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이들은 '스타 셰프'로 불리며
요리사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덕분에 파인다이닝은 비즈니스 접대 자리를 넘어,
특별한 기념일이나 개인의 미식 경험의 장소로 저변을 넓히기 시작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미식의 역사

18세기 파리의 첫 레스토랑에서 시작되어, 리츠와 에스코피에가 만들어낸 호텔 파인다이닝의 황금시대를 거쳐, 한국에서 미슐랭 가이드와 MZ세대와 함께 꽃핀 현재의 미식 문화까지. 파인다이닝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인간의 욕망과 가치, 정치와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오늘날 '밍글스'에서 코스 요리를 즐기는 MZ세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18세기 파리 시민들이 르 프로코프에서 새로운 미식을 경험하던 설렘과 같은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요리가 예술이 되고, 셰프가 스타가 되며, 식사가 경험이 되는 현재의 파인다이닝 문화는 결국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욕망, 더 나은 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의 연장선상에 있다.


출처 : (교양인이 알아야 하는) 음식의 역사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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