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패스트푸드의 탄생설화
국은 밥 다음이요.
반찬에 으뜸이라 국이 없으면 얼굴에 눈이 없는 것 같은 고로…
1924년 『조선무쌍신식 요리제법』에 기록된 이 문장은 한국인에게 국(湯)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국 없이는 밥을 말아먹을 수가 없다는 이 선언적 문구에서, 우리는 한식의 근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설렁탕(雪濃湯), 해장국(解酲湯), 곰탕(熬湯). 한국 국밥문화의 3대장이라 불리는 이들의 이름에는 각각의 탄생 배경이 숨어있다. 곰탕은 '곰다' 즉 오래 끓인다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소뼈와 고기를 푹 삶아낸 국물을 뜻한다. 설렁탕은 조선시대 흥천사 근처에서 백성들에게 나눠주던 '선농단(先農壇) 잔치 음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설농탕“이라는 말이 빠르게 굴려지며 굳어진 이름이라는 해석이 함께 전해진다. 해장국은 술로 지친 속을 풀어준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으로, 지역마다 콩나물이나 선지, 내장 등을 넣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처럼 세 음식의 이름은 각각 조리 방식, 역사적 배경, 섭취 목적에서 기원한 것으로, 한 그릇 국밥 문화 속에서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주목받아야 할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바로 돼지국밥이다.
돼지국밥의 역사는 두 갈래 길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영도 쪽에서 제주도 돼지를 반입해 해방 전부터 끓여 왔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이북 피란민들이 창업한 이북식 국밥의 계보다.
일제강점기 부산 항만 노동자들의 음식으로 정착한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피난민 시기를 거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1956년 개업한 할매국밥이 보여주는 철학은 흥미롭다. 이 집은 뼈를 거의 쓰지 않고 고기만으로 감칠맛 나게 끓여낸다. 나주국밥이나 서울 장국밥과 같은 계열로, '토렴국밥(湯廉湯飯)'의 전통을 이어간다. 하루 500인분을 위해 50킬로그램의 고기를 사용하며, 갓 삶은 고기를 하루 두 번(오전 6시, 오후 2시) 준비한다.
맛의 비결은 나이 든 삼겹살과 어깨 쪽 앞다릿살을 사용하는 데 있다. 비계와 고기의 비율이 잘 잡힌 게 관건이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백년가게에서 배운 것들>의 저자 박찬일은 "어떤 맛이 입에 인이 박힌 채 기억에 저장되면 사람들은 그 맛을 최고로 친다. 맛은 보수적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더 잘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바로 장인정신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전통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돼지국밥은 지역에 따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부산형은 사골을 장시간 고아낸 뽀얀 백탕형(白湯型)이 주류다. 기본 국물은 담백하게 내고, 식탁에서 손님이 새우젓·다대기로 간을 조절하는 문화가 일반적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춰 완성하는 국밥'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반면 양산·김해형은 사골 진탕보다는 맑고 담백한 국물이 주류다. 절제된 다대기 사용 경향이 강하며, 새우젓·소금으로 기본 간을 맞춘다. 지방감과 냄새를 최소화하고, 맑은 곰탕 같은 개운함을 선호한다.
한편 대구·경북형은 순대·내장이 핵심 토핑으로 기본 그릇에서부터 비중 있게 담긴다. 그릇에 양념장을 미리 넣어주는 집이 많아 체감 매운맛이 강하다. 구수·칼칼한 풍미가 강조되며, 내장·순대가 국밥의 주연으로 올라서는 지역적 특색을 보인다.
이러한 지역적 다양성 속에서도 돼지국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토렴(湯廉)'이다. 밥을 적당히 말아 속을 든든히 채우는 이 방법은 세계 음식사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요리 기법이다. 토렴에는 또 다른 맛의 비결이 숨어 있다.
뜨거운 밥을 그대로 말면, 전분이 녹아 국물이 탁해져서 맛을 버리게 된다.
오히려 밥이 적당히 식어서 단단해진 다음 토렴하면 온도도 맞고,
밥 알갱이의 씹히는 맛도 살아있는 최상의 상태가 된다.
근대에 이르러 노동자 계급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고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국밥의 효용은 최대치가 됐다. 빨리 먹고 일하기에 국밥만 한 것이 없었다. 너무 뜨거운 탕국밥은 빨리 먹고 일해야 하는 일꾼들에게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음식사학자들은 고증한다. 따라서 토렴한 국밥은 일하는 자의 음식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국밥은 한국 최초의 외식메뉴이자 배달메뉴였다. 조선시대 중기 주막과 장터에서 국밥 형태가 대중화되었으며, 19세기말부터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철도와 시장 문화와 함께 국밥이 외식 메뉴로 정착했다.
흥미롭게도 일제강점기에는 이미 배달 서비스가 존재했다.
설렁탕집주인 중 일부는 양반 출신과 모던보이·모던걸들이
사회적 체면 때문에 직접 방문하기를 꺼려하자,
이들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서울 거리마다 설렁탕을 배달하는 배달부들이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층의식과 신분제 인식이 남아있던 시대에, 음식은 이미 계층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중국 『예기(禮記)』에 국을 양(陽), 밥을 음(陰)이라 칭한 걸 보면 음식의 기본 구조를 이 두 음식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밥은 가장 빠르게 완전식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섬유질, 소금을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는 완전한 음식(Complete Food)인 것이다.
국밥의 패스트푸드적 성격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토렴이었다. 토렴이라는 민족 독자적인 기술을 만나 국밥은 화려하게 음식사에 등장한다. 빠른 식사가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국밥의 온도를 적절하게 맞춰주는 토렴은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돼지국밥은 항만 노동자들의 식사에서 시작되었다. 부산 항구의 하역 노동자들과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만들어낸 이 음식은 저렴한 한 끼, 노동 후 체력 보충, 숙취 해소, 향토적 체험이라는 다층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부산 범일동의 삼화고무(나이키 운동화 제조) 인근에서 성업했던 할매국밥의 사례는 인상적이다. 신발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으로 시작된 이곳은 지금까지도 연중 4일(설날과 추석)만 쉬는 극한의 영업으로 손님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있다. "식당은 늘 문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창업자의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는 영업철학 때문이다.
돼지국밥의 조리법에는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블랜칭은 고기나 뼈를 끓는 물에 짧게 데친 후 처음 육수를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로 본 끓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블랜칭을 지나치게 오래 하면 고기에서 맛 성분이 빠져나가 국물이 밋밋해질 수 있다. 블랜칭 여부와 시간은 "냄새를 잡되 맛은 보존"하는 균형의 문제다.
추출 시간은 국물의 진하기와 탁도를 결정한다. 지나치게 오래 끓이면 국물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기름져서 느끼함이 생길 수 있다. 숙성 방식은 풍미 강화와 맛의 안정감을 부여한다. 우려낸 국물을 식혔다가 다시 데우거나 하루 이상 숙성해 두는 과정을 통해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
간맞춤 체계도 정교하다. 새우젓은 염도 조절과 감칠맛, 소금은 기본 간, 다대기는 칼칼한 풍미, 들깨가루는 고소함 추가라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돼지국밥은 단순한 한 그릇 음식이 아니다.
이 안에는 부산·경남 지역의 정체성, 근현대 한국사의 격동,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한국인의 음식 철학이 모두 녹아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에서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제사를 지내며, 밥과 국(탕)을 기본으로 하는 상차림 전통을 확립했다. 이러한 국 문화의 전통은 근대 이후 국밥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으며, 돼지국밥은 이 과정에서 지역적 특성과 계층적 의미를 함께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돼지국밥의 위상은 단순한 지역 음식의 전국적 확산 차원을 넘어선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향토 음식에서 시작하여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사랑을 받게 된 현상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변동과 소비 트렌드 변화가 빚어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돼지국밥이 갖는 독특한 매력은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충족시킨다는 점에 있다. MZ세대에게는 '힙한 로컬 푸드'이자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템으로 어필하는 한편, 기성세대에게는 노동과 서민 문화에 대한 집단 기억을 환기시키는 정서적 음식으로 기능한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부각된 가성비와 포만감 중심의 소비 패턴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HMR 및 밀키트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돼지국밥의 해외 진출 역시 단순한 한류 열풍의 수혜를 넘어
K-푸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미 글로벌화에 성공한 김치찌개나 불고기와는 달리,
돼지국밥은 '고기 국물과 밥의 결합'이라는 보편적 선호도에
한국만의 독창성을 결합한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돼지국밥의 성공은 단순히 음식 자체의 맛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적 원형과 현대적 생활양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타난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로컬에서 글로벌로' 확장되는 궤적은 향후 한국 음식 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있어 중요한 참고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박찬일), 한식문화사전(주영하 외) 등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