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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4 고성->통영 22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설렘을 품고 통영으로 나섰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겨울도 설레는지, 때아닌 봄바람이 불었다. 특별한 날인만큼 혼자 보내기 싫었다. 게스트하우스 파티를 신청했다. 왁자지껄한 밤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파란색으로 잔뜩 칠한 바다가 보였다.


아, 푸르다. 항상 푸르른 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아.


게스트하우스 파티가 시작됐다. 테이블에는 5명의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았다. 항공사 형, 회사원 형, 코레일 동생, 대학생 동생과 함께 술 파티를 벌였다. 1시간 만에 소주 5병을 마셨다. 얼마나 편했으면 처음 보는 자리에서 욕이 뛰쳐나왔다. 항공사 형이 깜짝 놀라더라. 전혀 욕하지 않을 모범생 같은 사람이 욕하니까 놀랐다고 했다.

필름은 빠르게 끊겨 대화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확실히 편했다. 나를 보여줬다. 발가벗겨진 기분에도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가리지 않으니 시원했다. 자유는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길을 잃고, 추위에 떨고, 배고픔을 참으면서 얻은 자유였다. 잃어버린 감각을 찾았다. 먹고, 싸고, 자는 아주 원초적인 감각을 말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남에게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그런 거창하고 복잡한 짓은 필요 없었다.


이 자리를 즐겨라. 배고프면 먹어라. 목마르면 마셔라. 즐거우면 웃어라.


그동안 얼마나 억눌렸는가. 답답한 가면을 써왔던가. 나는 과감히 버렸다.

나는 나를 몰랐다. 눈치 보고 의식하기 바빴다. SNS나 책에 나오는 모습이 가장 쉬웠다. 수학공식처럼 명확했다. ‘매력적인 사람', ‘조용하지만 강한 사람', ‘예의 바른 사람' 여러 개 가면을 상황에 맞게 썼다. 그렇게 익숙해졌다. 가면을 쓴 뒤로 만남이 수월했다. 적당히 맞춰주고 어울리다 보니 ‘좋은 사람'으로 불렸다. 여러 사람이 좋아하니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뭐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혼자는 사유에 빠지게 했다. 의문이 생겼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진짜 나일까?’ 거짓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거짓말과 흡사해 사람들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빠지게 했다. 한동안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기 전까진 어림없었다. 아주 편안할 때 나를 상상했다.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낼 때, 대화가 가능한 시끄럽지 않은 자리에 있을 때, 때론 감정에 몸을 맡기고 악을 지를 때, 즐거울 땐 서슴없이 비속어를 사용할 때였다. 활발하게 방방 뛸 수 없다. 평범히 녹아드는 존재로 통통 튈 수 없다. 최소한의 예를 배웠을 뿐 예의 바르지도 않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왜 애썼는가. 삶을 관통한 지혜를 얻은 마냥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할 거야. 나답게 살자’


나를 조금 알게 됐다. 나는 말수가 적은 조용한 사람이다. 대신 들을 수 있다. 통통 튀는 매력이 없을뿐더러 낯가린다. 그래도 짓궂거나 억지스러운 상황이 아니라면 노래 정돈 한다. 예의 바르거나 기품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욕도 잘한다. 대신 눈치는 있다. 이제 소위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다. “그게 나인 걸 뭐"라며 웃어넘긴다. 그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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