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인천 22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아침 공기는 아직 단단했다. 바람은 차가웠고, 햇빛은 그 차가움을 쉽게 풀어주지 않으려는 듯 낮게 세상을 비추었다. 나는 늘 그렇듯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걷는 중이었다. 도보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 가느냐가 아니라, 언제 멈추고 무엇을 바라보느냐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갯벌이 보였다. 썰물은 늘 많은 것을 드러낸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땅의 주름과 시간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사람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안에 어떤 결이 있었는지를 아는 존재가 사람이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거창한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도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신호등은 애매한 노란빛으로 나를 붙잡았다. 건너도 되고, 기다려도 되는 시간. 도보여행을 하며 가장 자주 마주치는 시간이었다. 빨리 움직여야 할 이유도, 굳이 멈출 명분도 없을 때. 나는 대개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움직이지 않는 선택이 나에게는 더 많은 생각을 허락하기 때문이었다. 도로 옆으로 바다가 보이고, 전선과 가로등이 풍경을 가로질렀다. 자연과 인공이 어색하게 섞인 길은 나와 무척 닮았다. 어딘가로 향하곤 있지만, 도착점을 모르기에 아직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었다.

걷는 행위는 세상을 천천히 소비하는 일이나, 자신을 서둘러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우리는 보통 삶을 설명하기 위해 이유를 찾고, 방향을 정하고, 그 결과로 자신을 규정지으려 한다. 그러나, 걷는 동안만큼은 그러한 해석의 욕망이 잠시 느슨해진다. 목적이 앞서지 않는 행위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감각이, 발걸음 사이사이에 스며든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언제가 적절한 순간인지, 그리고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망설임은 내게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된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가능성. 걷는 시간은 그 불확실함을 해소하려 들기보다, 그대로 두는 법을 가르쳐준다.

속도를 늦추면 판단도 늦어진다. 판단이 늦어질수록 세상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 역시 완성되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나를 섣불리 평가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앞서 단정하지 않았고, 도착하지 않은 미래로 현재를 재단하지도 않았다. 도보여행은 나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용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