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김포로 가는 길에 반가운 연락이 왔다. 같은 부대에서 동고동락했던 후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인스타그램으로만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곤 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신기했다. 전국일주를 하다 보면 참 별일이 다 생긴다. 사람을 만나게 해 준다. 수색중대 후임이었는데(나는 6사단 출신이다) 지금은 김포에서 일하고 있다며 먼저 연락을 줬다. 잠깐이었지만 군 시절 이야기도 꺼내고, 그때 군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들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결국 만나기로 약속도 잡았다. 오래 혼자 걷다가 받는 반가운 연락은 생각보다 크게 남는다. 그날은 이상하게 그 짧은 연락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덜 외로웠다.
연락을 받은 뒤 마주한 풍경은 수확이 끝난 겨울 논이었다. 밭은 바싹 말라 있었고, 좁은 길은 마을 안쪽으로 조용히 휘어 들어갔다. 그 끝에는 파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전봇대와 전선이 하늘 위로 얽혀 있었고,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 사는 냄새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화려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별것 아닌 장면으로 지나칠지 몰라도, 그날의 나에게는 오래 남는 풍경이었다. 대단한 꿈이나 거창한 각오보다 결국 삶은 이런 소박한 자국들로 이어지는 게 아닐지 싶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나무 사이로 난 산책길이 이어졌다. 겨울나무와 소나무가 길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노랗게 기운 햇빛이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길에서는 이상하게 생각도 천천히 일어난다. 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지금은 그저 발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 않다. 금세 다른 생각이 밀려온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성공할 수 있어? 안 되면 어떡할 거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안 된다고 하면 뭘 할 수 있겠어."
말은 늘 이렇게 한다. 해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결과는 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고. 나름 당당하게 말은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남을 설득하기 위한 말이기 전에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말에 더 가깝다. 그렇게 말해놓고 돌아서면 금세 겁이 난다. '정말 안 되면 어떡하지?' 의문은 생각보다 오래 따라붙는다. 발걸음은 앞으로 가는데 마음은 자꾸 뒤를 돌아본다.
산책길을 지나자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수확이 끝난 겨울 밭, 드문드문 놓인 비닐하우스와 트럭, 그리고 멀리 늘어선 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농촌과 도시가 서로 등을 지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맞닿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저랬다. 현실과 이상도 아마 저런 식으로 붙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완전히 떨어져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섞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한 장면 안에 놓여 있는 상태. 좀만 더 여유로웠더라면, 좀만 더 잘 살았더라면, 현실이라는 이유가 이렇게 까지 큰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사람은 꿈만으로 살 수 없고, 현실만으로도 살 수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흔들리며 살아간다.
현실이라는 두 글자는 참 이상하다. 사람을 단숨에 작아지게 만든다. 세상을 새장처럼 느끼게 한다. 도전은 언제나 아름다운 말로 포장되지만, 결과까지 아름답다고 장담해 주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없다. 상황이 여의치 않고, 돈이 없고, 책임져야 할 것이 있고,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설이고, 그래서 포기한다. 그걸 두고 쉽게 변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건넌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성공한 사람이니까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주위 상황은 다 지워두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일. 그런 생각을 붙들고 있으면 어느 순간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누리고 싶은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무책임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쉽게 당당해지지 못한다. 성공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과연 정말 노력이라 불릴 만한 것들 인지도 자신이 없다. 남들은 더 치열하게 사는데,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붙잡겠다고 버티는 것뿐인 건 아닐까 싶어진다. '현실적으로...'라는 말은 그래서 더 무섭다. 내 선택을 한순간에 철없는 꿈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을 안고 걸었다. 저 멀리 강이 보였다. 강물은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하얀 아치형 다리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길은 이렇게 넓게 열려 있는데, 정작 내 마음은 자꾸 좁아졌다. 앞은 탁 트여 있는데 생각은 자꾸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참 이상하다. 이렇게 넓은 풍경 앞에서도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도전 끝에 정말로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따라와 있을까. 행운이 내게 찾아오기는 할까. 과연 어떨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데, 불안은 꼭 이미 정해진 미래처럼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공원이 보였다. 마른 갈대들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고, 굽이진 산책로는 한적하게 앞으로 이어졌다. 뒤편으로는 회색빛 건물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차갑고 건조한 계절인데도 풍경은 전체적으로 따뜻했다. 아마 햇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잠깐이라도 생각보다 풍경을 먼저 바라보는 내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스스로를 더 자주 의심한다. 그런데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모든 답을 오늘 다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것도 어쩌면 가고 있다는 뜻일지 모르기에.
조금 더 가니 호수가 보였다. 물은 잔잔했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풍경도 고요했다. 차가운 계절의 물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가라앉지 못하고 떠다니던 생각들이 조금씩 밑으로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실패가 무서운 건, 어쩌면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겁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패가 무서운 건 그만큼 바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겁나는 내 모습이 꼭 부끄럽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답을 내리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이를 걷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파란 지붕의 마을을 지나고, 산책길을 걷고, 들판을 건너고, 공원과 호수를 지나는 동안에도 뚜렷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멈춰 서서 겁만 내고 있을 때보다, 이렇게라도 걸어가고 있을 때 내가 조금 더 나답다는 것. 아직 성공도 실패도 오지 않았다. 아직은 길 위에 있다. 그래서 결과를 미리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안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더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