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인천->김포 28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일출의 붉은 기운이 창가에 번질 무렵,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 목적지는 김포였다. 배낭끈을 고쳐 매고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발밑에선 마른 흙이 서걱거렸고, 어디선가 새벽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언덕 위에는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고, 돌담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소나무들이 찬바람에 낮게 흔들렸다. 그 고요한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그런 아침은 사람을 잠시 말없게 만든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생각들조차 잠잠해졌다.


본격적으로 김포에 들어서기 전, 길가에서 우연히 한 인테리어 사장님을 만났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내 뒷모습을 보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10년 전, 자신도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눈빛에는 그때의 설렘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손짓마다 그 시절이 그대로 따라 나오는 것 같았다. 이 낯선 길 위에서 국토종주 선배를 만나다니. 괜히 반갑고, 괜히 뭉클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잠깐 같은 마음으로 이 길을 지나온 사람과 마주 선 것 같았다.


우리는 짧지만 진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인증사진도 남겼다. 비니를 눌러쓴 나와 체크무늬 스카프를 두른 사장님이 봉고 트럭 앞에 나란히 섰다. 뒤로는 낮은 산과 한적한 농촌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소박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는 남은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고, 나는 그 마음을 오래 품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낯선 사람이 먼저 꺼내준 이야기가 하루 종일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줄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했다. 거창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 짧은 응원이 오래 남았다. 괜찮다고, 잘 가고 있다고 누가 조용히 등을 한 번 두드려준 기분이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평화의 길' 2코스로 이어졌다. 골목을 벗어나자 강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왔다. 갈대밭은 바람을 따라 한꺼번에 몸을 기울였고, 낮고 긴 소리를 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천막 지붕을 얹은 전망대가 울뚝 서 있었다. 과거 군사 초소였을지도 모른 낡은 콘크리트 벙커 위에 나무 데크와 천막이 더해져 있었다. 긴장과 평화가 한자리에 같이 놓여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묘했다. 그 곁에는 'PEACE TRAIL', 'DMZ 평화의 길'이라 적힌 안내판이 묵묵히 서서 이 길의 시간을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 강물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고, 바람이 철조망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오래 귀에 남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쪽도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얇고 오래 끌리는 울림 같은 것이었다.


통진읍에 들어서자 코끝을 스치는 찬 공기에 문득 따뜻한 것이 간절해졌다. 근처 메가커피에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평소 같으면 고민도 없이 아이스를 골랐겠지만, 겨울 바깥에서 오래 걷는 생활은 내 사소한 취향까지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컵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손바닥을 녹였고, 쌉싸름한 커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얼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유리창 너머로는 한산한 읍내 거리가 보였다. 지나는 사람도, 오가는 차도 많지 않은 겨울 오후였다. 그 풍경과 커피 한 잔의 온기가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잠깐 숨을 고른 뒤 다시 배낭을 멨다. 잠시 앉은 것만으로 살 것 같았다. 별것 아닌 따뜻함인데도, 그런 순간은 사람을 다시 걷게 만들었다.


통전시장을 지나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서자 정겨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태양광 패널을 지붕 위에 얹은 파란 기와집과 주황 기와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전통의 곡선을 간직한 처마 아래 현대의 기술이 조용히 들어와 있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앞마당에는 검은 비닐을 덮은 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겨울 햇살이 내려앉았다. 마른 흙냄새 사이로 나무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겨울 끝자락의 밭이 조용히 봄을 준비하듯, 나 역시 이 긴 여정의 끝에서 무언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떠나오기 전의 나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 길목에서 전기 설비 작업을 하던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전봇대와 전선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골목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처럼 보였다. 차량 통제를 하며 잠시 쉬고 있던 아저씨는 내게 정말 걸어서 다니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의 눈빛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유튜브 '오지브로'같은 채널을 보며 대리만족 한다고 했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젊은 날의 열정이 같이 묻어 있었다.


말을 마친 그는 잠시 먼 산 쪽을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 어떤 시간들이 들어 있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잠깐의 침묵이 괜히 마음에 남았다. 사람은 가끔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걸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골목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가 건네준 "멋있다"는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마음은 덜 춥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진심은 그렇게 사람 안에 오래 남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조용히 힘이 되어주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길 위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내 보였다. 지나온 여정과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진심 어린 응원. 그 짧은 나눔이 하루 종일 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마음을 꺼내 보이는 일이 꼭 상대에게 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그런 일이 사람을 더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늘 마음을 숨기는 쪽에 익숙했는데, 오히려 면저 내밀어진 마음 앞에서 더 오래 멈춰 서게 됐다.


'세바시 인생질문 3 : 당신이 가진 상처를 다른 이와 나눠본 적이 있나요?'


나는 사실 속마음을 깊이 감추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내 상처를 꺼내 보이는 일이 상대에게 버거운 짐이 될까 봐 두려웠고, 어렵게 꺼낸 진심이 "그 정도는 다 그렇지"같은 말로 가볍게 넘어가 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상처를 자꾸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은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팠는지조차 희미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상처를 어떻게, 어디까지,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상처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상처를 꺼냈을 때 돌아올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정받지 못할까 봐,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질까 봐, 결국 또 혼자 남겨질까 봐 겁이 났다.


늘 내 마음의 아픔보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그러다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날이면, 당황한 상대의 눈빛을 보고 뒤늦게 스스로를 탓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마을의 집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속으로는 온기가 필요한 공간이 있을지 모른다고. 나 역시 그렇다. 사람인데 늘 강한 얼굴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꾸 묻어두기만 하면 언젠가는 그 마음이 안에서부터 곪아버릴지도 모른다. 괜찮은 척 넘긴 감정들이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는 걸, 나는 이미 여러 번 늦게 알아차린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 마음을 드러내 보려 한다. 오늘 길 위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내 상처를 어렵지 않게 꺼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상처가 서로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듬는 온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은 서툴고, 여전히 두렵다. 그래도 예전처럼 완전히 숨기고만 싶지는 않다.


오늘 내가 걸어온 길처럼, 그날도 분명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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