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8 서울->포천 31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서울숲 스테이에서 포천 하비비 무인텔로 가는 길을 지도에 찍어보니 8시간 26분이 나왔다. 막상 저 시간을 걸어간다고 생각하니 길이 멀게 느껴졌다. 오늘도 짧지 않겠구나 싶었다.


서울숲을 떠난 뒤 처음 보인 건 높은 아파트와 하천길이었다. 길 위로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보였다. 정자와 계단도 있었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는데 오래 눈에 남았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잠깐 쉬어가는 공간이 같이 있는 풍경이었다. 복잡한 도시 안에도 이런 자리가 있다는 게 괜히 좋았다. 고가도로 아래를 지날 때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위로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크게 휘어 있었고, 아래로는 좁은 하천이 흘렀다. 양옆에는 겨울나무와 마른 풀이 있었고, 뒤로는 아파트와 건물이 여럿 보였다. 예쁜 풍경이라기보다는 익숙한 풍경에 가까웠다.


계속 올라갈수록 산이 크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산은 북한산이었다. 동네 건물들 뒤로, 하천과 산책길 뒤로 북한산이 보였다. 가까이에는 길과 사람 사는 동네가 있고, 멀리에는 바위산 능선이 놓여 있었다. 하천 옆으로는 운동기구가 있었고, 흰 그늘막도 보였고, 물 위에는 디딤돌이 놓여 있었다. 평범한 동네 풍경 뒤로 북한산이 보이니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조금 더 올라가자 북한산은 더 가까워 보였다.


포천으로 가는 길은 대단한 풍경만 이어지는 길은 아니었다. 높은 아파트, 공원, 하천과 다리. 다 평범한 장면들이었다. 화려한 여행이라기보다 장면이 조금씩 바뀌는 평범한 여행이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길은 점점 북쪽으로 길어졌고, 익숙한 도시 풍경 뒤로 북한산이 들어왔다. 생활권과 산이 같이 보이는 장면들로 이어졌다. 그 변화가 좋았다. 크지 않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심심하지만, 그 심심함이 특별하지 않고 흔하디 흔한 것이라 오래 남을 것 같다.


'세바시 인생질문 3 : 당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가요?'


올바른 선택이란 결국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선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선택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 있는지도 중요하다. 경쟁할지, 순응할지, 나아갈지, 결국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의 정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충분히 묻고 답해본 뒤에 내리는 선택이어야 한다. 그래서 선택은 늘 자기 대화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택 자체에 완전한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에 내 의지가 반영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그리고 그 결과까지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함께하느냐도 중요하다.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인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인지. 그런 것들이 함께할 때 비로소 올바른 선택이 된다. 그리고 그런 선택만이 결국 사람을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떤 선택을 하며 나를 앞으로 밀어왔을까. 돌아보면 내 삶에서 오래 남아 있는 선택들은 는 '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세바시 인생질문 3 : 당신은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나 본 적이 있나요?'


20대 중반, 전역 직후에는 변하고 싶은 마음이 유독 컸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조급했고, 지금보다 더 단순했다. 지금의 나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었고, 무언가 달라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비슷한 생각이 맴돌 것 같았고, 익숙한 자리 안에서는 익숙한 나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느꼈다.


보통 이런 시기에는 해외여행을 떠올린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색다른 풍경을 보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그런 경험도 분명 매력적으로 보였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시간을 보내면 정말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런 방식의 변화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도보여행이었다. 블로그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순간 이상할 만큼 눈이 반짝거렸다. 가슴도 괜히 두근거렸다. 몸은 분명 힘들 텐데,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길 위에 나를 오래 세워두는 여행이라는 점이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길 위에 서면 정말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한 내가 아니라, 조금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걸었다. 4대 강 국토종주길을 따라 부산까지 걸었다. 처음에는 그저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정말 해낼 수 있는지, 그런 것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막상 걷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과 마주하게 됐다. 몸이 힘든 순간도 있었고, 혼자라는 감각이 유난히 크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었다.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날도 있었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풍경 하나에 괜히 힘이 나기도 했고, 끝까지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묘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 경험은 내게 꽤 중요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시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도보여행을 즐기게 됐다. 남해까지 걸어가기, 강릉까지 걸어가기, 전국일주까지. 자잘한 것들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을 만큼 걸었다. 길을 잃은 적이 있었고, 계획을 바꾼 적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만난 적도 많았다. 그런 시간들이 쌓일수록 나는 조금씩 나를 더 알게 되었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 누가 짜놓은 길보다 스스로 정한 방향을 따라갈 때 더 즐거운 사람,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겁이 나도 일단 부딪혀보는 사람. 걷는 동안 그런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물론 그 과정이 늘 반갑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는 건 좋은 면만 확인하는 일이 아니었다. 방황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다. 이성보다 열정이 앞서 어른스럽지 못하게 행동한 적도 있었다. 마음이 먼저 뛰면 생각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었고, 하고 싶은 마음만 앞세우다가 미숙한 선택을 한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들도 분명 있다. 그래도 그 시간을 전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니까.


결국 나는 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고 싶고,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고, 흔들리더라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도 물음표가 많고, 여전히 확신보다 망설임이 익숙할 때도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있다. 나는 가만히 머물기보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결국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


이제는 예전처럼 무작정 변하고 싶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더 잘 꺼내고 싶다는 마음에 가깝다. 새로운 나를 찾는다는 것도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있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모습을 하나씩 발견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걷는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어떤 순간에 가장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이 조용히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선택이 나를 앞으로 가게 하는지, 어떤 선택이 내 마음이 빠진 선택인지, 무엇을 선택했을 때 내가 나를 덜 부끄러워하는지. 삶은 어쩌면 그런 질문들을 오래 붙들고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질문들 앞에서 서툴지만, 적어도 예전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된 것 같다.


올바른 선택이란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내 의지가 담겨 있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일 것이다. 새로운 나를 찾는다는 것도 전혀 낯선 누군가가 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가능성을 조금씩 확인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도 아주 거창한 결심보다는, 원하는 방향을 외면하지 않는 일인지 모른다. 두렵더라도 선택하고, 흔들리더라도 걸어가고, 부족하더라도 끝내 나아가려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바꾸는 사람, 마음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계속해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지금의 나는 아직 그 과정 한가운데 있지만, 적어도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예전보다 더 분명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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