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0 의정부->서울 33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의정부에서 사당으로 내려오는 길은 점점 더 서울 같아졌다. 처음에는 하천 옆으로 가게들이 붙어 있었다. 좁은 물길 옆에 식당 간판이 달려 있고, 그 위로 건물들이 다닥다닥 올라가 있었다. 조금 더 가니 큰 교차로가 나왔고, 차가 많아졌고, 아파트와 상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더 내려오자 한강이 보였다. 다리와 도로와 차들, 멀리 보이는 건물들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은 커졌고, 나는 그 안에서 계속 걸었다.


D-1. 내일이면 집에 간다. 이 말을 쓰는 것만으로도 몸이 먼저 풀리는 것 같다. 내일은 아마 내가 가장 많이 걸어본 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많이 걸어본 길은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킨다. 처음 보는 길에서는 계속 판단해야 하지만, 익숙한 길에서는 조금 덜 긴장해도 된다.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있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어렴풋이 감이 온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천천히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그 감각이 좋다. 결국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어야 오래 버티는 것 같다.


'세바시 인생질문 3 : 당신이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는 잘 살고 싶다. 이 말은 너무 크고 막연해서 쉽게 꺼내지 못하지만, 결국은 그 말에 가깝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꼭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내가 나를 볼 때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어제보다 오늘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았으면 좋겠고, 적어도 뒤로 밀리고 있다는 느낌만은 덜했으면 좋겠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쉽지 않다.


나는 남과 비교를 많이 했다. 비교를 하면 대체로 내가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이 먼저 보였다. 자연스럽게 작아졌다. 말을 아끼게 됐고, 사람들 앞에 서는 일도 불편해졌다. 조용한 사람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시간도 길었다. 조용한 것이 문제는 아니었지만, 나는 자꾸 위축된 쪽으로 기울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더 숨게 됐고, 숨어 있을수록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한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그 감정이 나를 바닥에만 눌러놓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답답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걸었다. 좋게 말하면 도전이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몸을 몰아붙이면 뭐라도 바뀔 줄 알았다. 실제로 바뀐 것도 있었다. 걷고 또 걸으면서 버티는 힘이 생겼고,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끝까지 간 경험은 사람을 조금 바꾼다. 나는 그걸 몸으로 배웠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전보다 나아졌다고 느끼는 순간, 착각도 함께 데려온다. 나도 그랬다. 자신감이 생긴 건 맞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자신감이 이상한 쪽으로 부풀었다. 뭘 해도 될 것 같았고,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심할 때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다. 실제로 달라진 부분이 있었던 건 맞지만, 나는 그 변화를 너무 크게 받아들였다. 성장이라기보다 취해 있던 상태에 가까웠다.


그 뒤로는 나를 보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못났다고만 생각할 때보다, 괜찮다고 믿기 시작했을 때가 오히려 더 위험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낮게 볼 때도 틀리지만, 높게 볼 때도 틀린다. 결국 중요한 건 크게 보느냐 작게 보느냐가 아니라, 그냥 제대로 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다. 잘한 것은 더 크게 보고 싶고, 못한 것은 적당히 넘기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또 이상한 데로 간다. 그래서 요즘은 자꾸 나를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괜히 들떠 있는 건 아닌지.


부족한 부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데서 또 나온다. 예전에는 그게 싫었다. 언제쯤이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지는 걸 기대하기보다, 계속 손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성격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다. 한 번에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계속 만질 수는 있다. 어떤 부분은 더 밀어붙이고, 어떤 부분은 덜 튀어나오게 누르고, 어떤 부분은 아예 다른 쓰임으로 바꿔볼 수도 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비교도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남과 비교할 것이고,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그 비교에 바로 먹히고 싶지 않다. 자극은 받을 수 있어도 휘둘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보면 초라해지는 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뭘 더 해야 하는지 보는 데까지 가고 싶다. 그게 잘 되지 않는 날도 많겠지만, 적어도 그런 쪽으로 가고 싶다.


이번 길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동네의 좁은 풍경이 보였고, 조금 더 가니 도시가 넓어졌고, 한강 쪽에 다다르자 시야가 갑자기 커졌다. 도르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건물은 높아졌고, 차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런 장면 앞에 서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괜히 들떠 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고, 여전히 어설프고, 여전히 배울 게 많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쪽이 오히려 더 편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마 집에 가면 긴장이 좀 풀릴 것이다. 익숙한 길을 걷고, 익숙한 공기를 마시고, 익숙한 공간 안에 들어가면 몸이 먼저 안다. 아, 이제 좀 괜찮아지겠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달라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비교하고, 또 실수할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 완전히 같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가 어떤 식으로 무너지고, 어떤 식으로 들뜨고, 어떤 식으로 다시 정신을 차리는지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내가 삶에서 바라는 건 대단한 이름이 아니다. 그냥 끝까지 망가지지 않고, 계속 손보면서 가는 사람이고 싶다. 잘난 척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작아지지도 않고,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정도의 바람이면 너무 시시한가 싶다가도, 사실은 그게 제일 어렵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직도 이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나는 가만히 썩고 싶지는 않다. 느리더라도, 어설프더라도, 계속 바뀌는 쪽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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