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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Aug 19. 2024

EP.12 양구 21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시끄러운 기계음 소리의 알람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밖에서 잘 때면 나는 알람을 끈다. 닭 울음소리가, 새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열게 했으며, 내리쬐는 햇볕이 눈을 뜨게 했다.


소양강 꼬부랑길을 따라 양구로 향했다. 사명산, 봉화산, 계명산을 액자 삼아 그사이에 소양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양호는 면적 1,608ha, 저수량 27억t으로 면적과 저수량에서 한국 최대의 크기로 "내륙의 바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세 개의 산을 가득 담은 호수는 진한 녹색으로, 햇빛을 만나 옥빛처럼 빛났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하늘은 흐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 낀 호수는 신비로웠다. 호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전국의 산신령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산 정상에 구름 차를 주차해 놓고 혹시나 보일지 싶어 안개로 모습을 가렸다. 꼬부랑길을 지날 때 마주하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바뀌는 소양호의 패션쇼는 눈을 즐겁게 했다. 아니 더 가까이 와서 봐달라는 듯 나를 홀렸다.

긴 꼬부랑길을 홀로 걸었지만 길은 외롭지 않았다.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의 기운 넘치는 응원, 그리고 속도를 즐기는 차들. 굉음에 놀라기도 했지만, 덕분에 밋밋한 걷기에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꼬부랑길이 끝나가자, 이해인 수녀의 시 동산이 나타났다. 그녀가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제비꽃 연가


멀리서는 알 수 없다. 당신의 눈을 바라보아야 그 깊은 눈망울 속에 잠긴 마음을 들여다볼 것이며, 입을 바라보아야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이젠 서슴없이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리라. 그대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알고자 한다면 다가가리라. 거기서 그대의 향을 맡고, 그대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대의 소리를 들으리라.

꼬부랑길을 내려와 작은 마을 여럿을 지나니 저 멀리 아파트가 보였다. 생각보다 일찍 도시에 도착했다. 양구, 청춘 양구라는 이름으로 '양구에 오시면 10년이 젊어집니다.' 슬로건이 크게 보였다. 꼬부랑길을 걸어본 나로서 문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생애 처음 오는 양구,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유명한 육개장을 먹을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배고픔을 버티고 버텼는데, 김장으로 인해 장사를 안 한다는 것이다.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인생이 다 그렇지. 계획하면 망쳐놓고 어떻게 하는지 보는 게 우리가 믿는 신의 취미인 것을. 바로 옆에 순댓국집이 있길래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사장님! 순댓국 하나랑 막걸리 하나요!”,


막걸리 하나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럴 때면 인생 별거 없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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