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화천→양구 22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65,000원의 거금을 들인 전기매트는 실패였다. 기대가 컸는지 몰라도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괜히 전기만 많이 잡아먹는 바람에 보조배터리는 0%가 되었다. 오늘도 텐트에서 자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다행히 캠핑장에 보조 전기가 있어 급하게 충전했다. 텐트를 정리하는 동안 충전한 결과 18%. 턱없이 부족한 배터리지만 잘 버텨주리라 기도했다. 출발 준비를 끝내니 주인아주머니가 보였다. 춥지 않았냐고 물으며 안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이 나타났다. 오음리였다. 초등학교와 소방서도 있는 큰 마을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을 뒤로 거대한 산은 수호신처럼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둘 듯이 매섭게 내려다봤다. 이방인은 무서움을 느낌에, 눈을 깔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마을을 지나자, 산비탈 길이 이어졌다. 산책하고 내려오는 마을 사람을 만났다.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데도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볼 뿐 신기해하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았다. 평범한 반응에 마음이 편했다. 나는 숭고한 이유를 품고 떠나지 않았다. 인생의 긴 과정 중 ‘방황’을 겪고 있을 뿐이었다. 방황의 표현이 전국일주였다. 삶을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탈길을 올랐다. 산속 미로에 갇히면 어쩌지 싶을 정도로 사방이 온통 산이었다. 진짜 방랑자가 된 기분에 흥겨웠다. 이 드넓은 장소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보이는 건 울창한 나무와 푸른 하늘,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숲, 지나온 마을뿐이었다. 헬리캠이 있다면 꼭 담고 싶은 길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따스함이 마을에 내리니 황금빛으로 변했다. 꿈에 그리던 자연을 걷는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배가 고팠다. 가진 거라곤 건빵과 비가열식품뿐이었다. '편의점이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는 순간 저 멀리 익숙한 파란색 간판이 보였다. 신이 도왔다.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스, 물, 메로나, 핫바를 사 들고 옆 정자에서 쉬었다. 이런 단순한 것들로도 행복하다니, 역시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검색해 보니 터널만 지나면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만 신도로를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야 했다. 사람이 이리도 쉽다. 보조배터리 18%, 핸드폰 배터리 5%, 짐벌캠 배터리 1칸. 다음날, 양구읍에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터널을 지나기로 했다.
자동차가 바로 옆에서 쌩쌩 달렸다. 100m 정도 전진했을 때, 남은 거리가 좀 이상했다. 이 숫자가 맞나? 정확하게 2,800m라고 적혀있었다. 터널 길이는 약 3km였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먼 거리를 걸을 자신이 없었다. 직선의 달콤함에 져버렸다. 터널 가장자리 쪽으로 올라가 빠르게 걸었다. 나보다 자동차끼리 사고만 안 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마음은 조급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빛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것도 잠시, 나오자마자 터널 관리 차량과 마주치는 바람에 해명해야 했다. 그리고 목적지인 웅진계곡으로 향했다. 웅진계곡 옆에 텐트를 치려 했으나 내려갈 수 있는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삼거리에 있던 공원에 텐트를 설치했다. 야영장이 아닌 곳에서 자는 첫 경험.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섰는데 그래도 하는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이렇게 하나씩 해나가면 진정한 방랑자가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