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따뜻했다. 펜션에서 나와 춘천으로 향했다. 도시로 상경한 사람의 마음이 이랬을까 왠지 모르게 설렜다. 자가용이 없어도 어디서나 이동하고, 먹거리가 넘쳐나고, 아파도 걱정 없고,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환한 불빛의 향연, 개성 넘치는 사람들, 보고 있으면 목이 아파지는 고층 건물이 있는 도시로 간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가 궁금해졌다. 북한강과 만났다. 이전처럼 변함없이 거대한 풍채로 흘렀다. 의암댐을 지나 의암호에 도착했다. 북한강은 호수로 변했다. 스카이워크를 따라가면 의암호 위로 나란히 움직이는 케이블카가 보였다. 3.61km의 국내 최장 케이블카라고 한다. 삼악산 정상으로 향할 때 춘천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의암호 산책길을 걸어 의암공원에 다다랐다. 푸른 도화지가 넓게 펼쳐진 공간에 가을의 선선함이 더해지니 둥둥 떠다니듯 가벼웠다. 의암공원을 지나면 카페가 보인다. '에티오피아의 집', 에티오피아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1968년 11월 25일 개관하여 현재까지 운영하는 유서 깊은 카페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향긋한 원두 향이 코를 마중 나왔다. 아프리카가 떠오르는 소품과 실내장식은 에티오피아 원두의 풍미를 더해줬다.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옆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큰 배낭은 어딜 가나 이목을 끌었다. 전국일주 중이라는 대화를 나눈 뜻밖의 인물은 바로 해파랑길을 직접 만든 사람이었다. 강원도에 살아 해파랑길 강원도 구간을 직접 총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우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나를 찍어주는 사람은 카페 사장님이었다. 50년이 넘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카페 사장님까지 만나다니 오늘이 운수대통(運數大通)이다.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준 두 사람에게 감사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겠지만 두 사람은 금방 자리서 일어났다.
낭만골목을 지나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효자동에 있는 낭만골목은 벽화골목이다. 골목골목 지나면서 여러 벽화를 보며 즐겼다. 골목길을 지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해파랑길, 남파랑길처럼 내가 직접 길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지역과 지역을 넘어가는 것처럼 길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나였기에 차별화를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양한 길을 소개하면 많은 사람에게 도보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하고, 도전정신과 성취감도 느끼게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걷고 있노라면, 그동안 매몰되어 있던 소망과 자유에 대한 꿈들이 다시 솟아난다. 그리고 부질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가능성들이 용기만 갖는다면 실제로 가능하리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라는 피에르 쌍소의 말처럼 길 위에선 가능성이 넘쳐났으며, 꿈틀거리는 용기 덕분에 꿈이 생긴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운영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아까 문자로 안내받은 방으로 향했다. 사람 하나 없이 적막만이 흘렀다. 짐은 대충 던져놓고, 빨랫감만 들고나왔다. 코인빨래방에 빨래를 돌리고 춘천닭갈비골목으로 걸어갔다. 춘천에서 유명한 ‘육림닭강정’을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닭강정만 먹자니 아쉬워 만두도 포장했다. 여기서 끝냈어야 했는데, 오는 길에 웬 포장마차가 눈에 들었다. ‘떡볶이와 어묵은 못 참지’라며 또 포장했다. 혼자서 4~5인분 치를 포장하다니 이놈의 거침없는 충동은 가히 병이었다. 빨랫감까지 더해져 양손 가득 들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홀로 지하 주방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였다. 40대 형님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젊을 적 50개국 나라를 여행했고, 여행을 다니던 2004년대엔 스마트폰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지도 한 장만 가지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지도만 보고 떠나는 여행이라니… 낭만 넘쳤다. 얼마나 다양한 사건이 벌어졌을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형님은 이탈리아가 너무 좋아 10번 이상 다녀왔다고 했다. 그 계기로 6년 동안 카페를 운영했지만 코로나19가 발병하고 결국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는 결말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지금처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이 없던 그 시절에 영국 구제에 빠져 싸이월드를 통해 판매·유통을 해보았다고 했다. 옷 장사 이야기까지 들으니 눈은 더욱 반짝거렸다. 형님 인생 자체가 도전이었고 낭만이었다. 내가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삶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현실 때문에 포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삶.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4년 그리스에 가던 중 북마케도니아에서 경찰들에게 걸려 되돌아갔던 사건이었다. 다른 외국인 남자도 1명 있었는데 그는 오직 올림픽을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북마케도니아는 비 솅겐 국가로 비자가 없으면 통과를 못했다. 솅겐조약은 유럽연합 회원국 간 무비자 통행을 규정한 국경 개방 조약으로, 솅겐 조약 가입국은 같은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국가 간 제약 없이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1985년 룩셈부르크 남부 솅겐에서 독일·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등 5개국이 처음으로 체결하였으며 1995년 효력이 발휘됐다. 현재는 27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룸메이트 형님이 부러우면서도 멋있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지만 본인은 자영업을 하는 것이 체질에 맞다고 준비 중이었다.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형님을 만나니 더욱 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마음은 있지만 용기가 없어 시작조차 못했던 적이 많았다. 용기를 얻기 위해 길로 나왔을 뿐인데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우스갯소리로 ‘끼리끼리는 과학이다’라던데 환경을 바꾸니 주변 사람들이 달라졌다. 무모하게 퇴사했지만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밤이었다. 계속해서 가다 보면, 끝까지 가다 보면 결실은 분명 이뤄질 것이다. 깊어지는 밤에 걸린 달은 점점 뚜렷해졌지만, 위스키에 절인 정신은 점점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