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졌는지 텐트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추위 걱정 없이 일어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텐트를 정리하고 힘차게 출발하려 하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값싼 것만 먹다가 비싼 것이 들어갔으니 배도 놀랄 수 밖에. 기름칠한 배로는 이 험한 길을 나설 수 없으니 시원하게 비워야 했다. 배고프고 간절한 순례자로 돌아가야 절실함으로 걸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폐쇄된 야영장을 지나고 있었다. 왼편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갔다. 주민인가 보다 하고 신경 쓰지 않고 길을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자전거가 멈췄다. 자전거에서 내려 돌아오는 사람은 주민이 아니라 여행자였다. 강촌까지 간다기에 동행했다. 어마어마한 내공을 지닌 여행자였다. 앞으로 걸어야 하는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을 모두 다녀온 사람이었다. 여행경험이 나보다 많으니, 앞으로 선배라 칭하겠다. 선배는 나처럼 배낭 하나 메고 걸어서 여행했다고 한다. 경험자답게 여러 조언을 해줬다. "눈치를 많이 보지 마세요" 눈치 보면 야영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양해를 구해야 할 상황엔 양해를 구하라고 했다. 하루 정도 텐트 치고 자는 일에 대부분은 이해한다고 했다. 특히 해파랑길은 인기가 많아 걷다 보면 야영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선배는 소리산 근처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진정한 야인(野人)이었다.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인근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방랑자를 직접 만나니 굉장히 흥분됐다. 나도 배낭 하나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자가 꿈이다. 선배는 점심을 사주겠다며 추어탕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술을 많이 마셨고 그로 인해 몸무게가 100kg으로 불어났다고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점심부터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데 주량이 어마어마했다. 소주 8~9병은 기본이었다. 살이 찌고 건강이 나빠지니 걷기를 시작했고, 코리아 둘레길을 걷고 나니 30kg이나 감량할 수 있었다. 시원한 막걸리에 취해 기억에 남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리산에 올랐는데 비가 일주일 내내 내렸다고 했다. 원치 않게 지리산에 꼼짝없이 갇혔고 비가 개기만을 빌었다고 했다. 기다림 끝에 비가 그쳤고 정상에서 본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여행하다 풍경이 마음에 들면 2~3일은 기본으로 더 머문다고 했다.
"너무 급하게 가려 하지 말고, 천천히 가. 풍경이 이쁘거나 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하루가 더 걸리더라도 보고 가는 게 좋아."
마음이 급하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게 된다. 그렇게 지나쳐버린 풍경은 영영 볼 수 없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지나친 것을 다시 보려 해도 멀리 와버려 되돌아갈 수 없다. 그때만 볼 수 있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 나보다 뛰어나고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하루빨리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에 조급했다. 나는 왜 저렇게 못 할까 자책했다. 스스로가 무능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시도하지만, 결과가 마땅치 않으면 금방 포기했다. 그렇지만 결실은 없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졌던 시도가 모여 지금 강원도 강촌까지 여정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닐까. 빠르지 않지만,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빠르게 나아가려고만 했다면 과연 깨달았을까. 전국일주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삶에 대해 고뇌하려 했을까. 길에서 선배 같은 사람을 만나 인생에 대해 배울 수 있었을까.
천천히 가자, 걷기처럼 한 발씩 내디디며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왼쪽도 오른쪽도 보면서 말이다. 빠르게 가기엔 삶이 너무나도 아쉽지 않은가. 아직 보지 못한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누구에게나 끝은 정해져 있고,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인데 말이다.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