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가 쌓였는지 아니면 침대의 아늑함에 일어나기가 싫었는지, 여러 번 울리는 알람을 끄며 잠을 이어갔다. 일어나 보니 9시였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10시에 길을 나섰다. 모곡밤벌유원지까지는 11km였다. 짧은 거리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배가 고플 때쯤 자동차들이 많은 식당을 발견했다. '샤인식당' 가게 앞에서 먹을까 말까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작업복 입은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어디까지 가요?" "고성이요!" "고성? 여기 고성이 고향인 친구가 있는데 잠시만 기다려봐. 인사 좀 해봐~"
그러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건장한 남성을 데리고 나왔다. 대한민국 참 좁다. 'TV는 사랑을 싣고'를 여기서 찍게 될 줄이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인사만 하고 빨리 자리를 피하려 했는데 아저씨의 호탕함이 발길을 붙잡았다.
"밥 먹고 가! 사줄게!!"
시원하게 밥 한 끼를 사주겠다는데 고민되어 머뭇거렸다.
"에이! 먹고 가~!"
오늘은 시간도 여유로웠기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럼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가게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옛날의 나였으면 어색한 자리에 절대 끼지 않았을텐데 걷기가 나를 많이 바꿨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정적이 흘렀다. 오늘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밥을 비비고, 식사를 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밥그릇만 쳐다보며 먹었다, 울고 싶었다. 분위기를 띄우는 성격이 아닌데 거기다 아버지뻘 되는 분들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치 보였다). 그러다 고성이 고향인 남성이 분위기를 풀고자 이것저것 물어봤다. 드디어 대화가 진행됐다. 그는 시간이 된다면 전국일주를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저씨는 옆에서 대단하며 놀랐다. 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말없이 밥만 먹었다. 이 세 명은 근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였고 샤인식당은 제휴 식당이었다. 식권으로 점심을 사먹는다고 했다. 덕분에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샤인식당에서 빛 같은 존재인 아저씨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 아니었을까.
샤인식당에서 1시간 정도 걸은 후에야 모곡밤벌유원지에 도착했다. 여기도 유명한 노지 야영장이라 그런지 도장계곡 야영장과 비슷하게 사람이 있었다. 수북이 쌓인 자갈들을 보니 이전 기억이 떠올랐다. '아… 여기도 팩이 잘 안 박히면 어떡하지?' 초보는 항상 불안했다. 역시나 불안함은 현실로 다가왔다. 잘 안 박히는 팩을 망치로 엄청나게 세게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힘들었지만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힘준 만큼 팩이 들어가니 매우 즐거웠다. 도장계곡 때보다 단축하여 텐트를 설치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여유가 생기니 뭔가 특별한 먹거리를 먹고 싶었다. 마침 뒤를 돌아보니 큰 현수막에 치킨집 번호가 적혀있었다. 곧바로 치킨을 주문했다. 치킨에 맥주가 없다? 치킨이 매우 섭섭해할 수 있으니 곧장 매점으로 향했다. 준비는 끝났다. 치킨, 너만 오면 돼!
"미야아오!"
치킨 냄새를 맡았는지 야생의 사냥꾼은 우렁찬 울음소리로 존재감을 뽐내며 다가왔다. 울음소리는 흠칫 놀라게 했다. 고양이는 주위를 맴돌며 치킨과 내 얼굴을 여러 번 바라봤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어이없지만 귀여운 사냥꾼을 보고 역할 놀이에 어울려줬다. 잔뜩 겁먹은 인간은 치킨을 작게 쪼개 바쳤다. 여러 번 그렇게 받아먹더니 배불렀나 보다. 눈을 스르륵 감으며 졸기 시작했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치킨 냄새를 맡고도 계속 잘까 싶어 치킨을 입 가까이에 대보았다. 눈을 번쩍 뜨더니 날름 먹는다. 또 존다. 갖다 댄다. 먹는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치킨이 다 떨어졌다. 그러자 고양이가 몸을 움직였다. 내 주변을 돌며 고양이 자세를 여러 번 보여줬다. 먹을 것을 더 달라는 협박이 아닌지 싶었다. 협박(?)이 먹히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짧았지만 함께한 추억이 있는데 세차게 가버리는 행동에 어이없었다. 사람을 호락호락하게 보다니 이곳 터줏대감은 막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