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쌀쌀했지만 불암산 정상에 비하면 코웃음칠 정도였다. 고작 텐트 지퍼만 열었을 뿐인데 낙엽이 널브러진 땅과 졸졸 흐르는 계곡이 보였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까지 들리니 이보다 평온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풍경은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다비드 드 브르통은 <느리게 걷는 즐거움>에서
“장소의 힘은 그저 단순히 관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잠기고 사방으로 가로지르며 관능적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풍경은 그저 하나의 대상처럼 앞에 있지 않고 감싸기도 하고 스며들기도 한다”
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제한된 기간이 아쉬웠다. 기간 안에 전국일주를 끝내야 했기에 걷기에만 집중했다).
오르막길을 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남자의 공통된 추억을 끄집어냈다. 군대에선 툭하면 훈련하고 산타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다. 나는 철원 GP에서 수색병으로 군 생활을 했다. 주마다 수색작전을 나갔는데 경사가 하도 높아 붙여진 ‘작살능선’을 타곤 했다. 그때와 비슷한 길을 숨을 헐떡대며 올랐다. 정상에 올라 뒤를 돌아봤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그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햇살은 작은 마을을 강렬하게 비춰 유독 눈에 띄었다. 풍경은 걸음의 원동력이 되었다. 내리막길은 고요했다.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노부부와 마주쳤다. 반가운 나머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인자한 미소로 받아주었다. “혼자야?” “네, 혼자예요” “왜 혼자 걸어, 짝 찾아서 걸어야지. 같이 걸어~ 같이!” 혼자라는 말에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외로움이 표정으로 드러나서였을까 노인은 같이 걸으라고 말했다. ‘같이 걸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 말은 나처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나아가라는 말이 아닐지 싶었다. 저기 두 손 꼭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처럼 말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사랑을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아니 변치 않는 사랑이 아니라 변하는 사랑도 사랑하는 거겠지. 그래서 저렇게 단단히 붙잡을 수 있는 걸 거야. 노부부가 멀어져갔다. 짝 찾기가 어려운데 손녀분이라도 소개해달라 그럴걸. 별생각 없었는데 외로움만 커졌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나타났다. “파이팅!”을 크게 외치고 빠르게 지나갔다. ‘외롭지만 파이팅’
설악면으로 이동하는 길은 예쁜 외관의 건물이 많았다. 수수한 자연과 대비되어 유독 눈에 띄었다. 저기서 자연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까. 자연을 거닐다 보면 귀촌을 상상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산 공기를 마시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그리고 즐겨 읽는 책을 들고 테라스로 향한다. 작게 꾸며놓은 텃밭을 가꾸고, 오후에는 노래 들으며 풍경을 즐기고, 저녁에는 하루를 기록하며 마무리한다.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이리도 달콤한데 정작 현실은 쓰다.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렸다. 시계는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다. 목조 집을 짓는 현장 앞에 넓은 공터가 있었다. 잘됐다 싶어 공터에 앉았다. 사람 사는 줄 몰랐는데 집에서 아주머니가 나왔다. 벌떡 일어나 인사를 나눴다. 뒤이어 트럭을 탄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어디까지 가냐며 태워준다고 했다. “아, 마음만 받겠습니다. 걸어서 여행 중이라서요, 감사합니다” 정중히 거절한 후 집주인 부부를 떠나보냈다. 그들이 떠나고 마음 편히 텐트 정리를 했다. 공간이 충분하니 넓게 펼쳐 닦고 말리는 작업을 했다.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 안 했는데, 텐트를 접고 나니 트럭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안으로 들어와서 쉬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죄송스러워 정중히 거절했다. 잠시 뒤, 점심을 먹는데 아저씨가 다시 나왔다. 대리석을 의자 삼아 비가열 식품을 먹는 내가 눈에 밟혔나 보다. 그는 “동생도 걷기를 좋아해서 그런가 계속 눈에 밟히네, 안에 들어가서 라면이라도 먹고 갈래요?” 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라면을 먹고 싶었으나 시간이 지체될까 봐 호의를 받기 어려웠다. 그렇게 아저씨를 보냈다. 덕분에 마음이 든든했다.
설악면에 도착했다. 오늘 중에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BHC, BBQ, 노랑통닭 등 프랜차이즈 음식점도 많이 보였다. 오일장도 열려 시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랜만에 사람들 속에 있으니 왠지 모르게 들떴다. 셀프 빨래방이 있어 밀린 빨래를 하고, 기다릴 겸 캠핑용품점도 구경했다.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카페 '아지트'에는 친절한 사장님이 있다.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는 내게 미니 와플을 건넸다. 도보여행할 때 되도록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한다. 나의 고생이 오히려 보는 사람 마음을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닐지 싶어 죄송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의를 받을 때면 굉장히 감사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따뜻한 사람을 많이 만난 날이었다. 앞으로 어떤 만남이 찾아올까 기대하게 했다. 사람에게 상처받거나 싫어졌을 때 이렇게 길을 떠나보면 어떨까 싶다. 내게 익숙했던 환경을 벗어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는다. 그저 걷는 이에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관심은 곧 정(情)으로 바뀐다. 낯선 곳에서 순수한 호의를 받았을 때 기분은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일 수 있고, 강렬히 원하고 있던 감정일 수도 있다. 난 이러한 경험 덕분에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