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고성 26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고성에 도착하는 날. 하늘도 축하해 주며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름의 흰색까지도 덮는 진한 파란색으로 칠해진 하늘. 몸도 가볍고, 기분도 날아갈 것처럼 높았다. 소똥령 마을을 지나고 30분 뒤, 크락션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 차선에서 다가오는 차량 한 대. 따봉을 멋지게 날려주시며 지나갔다. 조용히 응원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힘이 났다. 가는 길목에 여러 작은 마을을 지나고, 군부대도 지나쳤다. 최북단으로 향하는 길인 만큼 조금은 긴장되고 두근거렸다. 군 차량들이 지나갈 때면 왠지 모르게 겁났다. 혹시나 길을 세워 이곳을 지나가는 이유를 물어볼까 봐. 무서운 상상을 하며 빠르게 지나갔다. 몸이 잘려나가고 밑동만 남은 벼들을 볼 때 가을이 지나감을 느꼈다. 마을에서는 한 해 농사를 끝내고 농지를 정리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였다.
옛길을 따라 화진포에 도착했다. 김삿갓도 반하여 여러 번 왔다는 화진포. 윤슬로 푸르게 빛나는 모습에 왜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김일성 별장에 도착했다. 팔당댐을 지날 때 만났던 충전 아저씨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도착 인증 사진을 찍어 보냈다. 가까운 커피집에서 아이스티를 먹었다. 알고 보니 사장님과 팔당 2리 충전 아저씨가 아는 사이였다. 충전 아저씨가 빅 커피를 하시다가 커피차를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커피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커피가게를 차려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드리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다.
해가 저무는 오후 다섯 시, 거진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을 지나 텐트 칠 곳을 탐색했다. 선명하게 찍히는 발자국. 고성까지 걸어왔던 길에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공중화장실 앞, 편의점도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치는 중, 산책하는 주민이 춥지 않겠냐며 걱정을 하였다. 씩씩하게 자주 자봐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런 재미로 여행하는 거지요, 호호. 그럼 파이팅 하세요."
라고 답하였다. 이제는 제법 백패커 티가 났다. 텐트도 뚝딱 설치했다. 짐을 정리한 뒤,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사 왔다. 고성에 도착한 기념으로 수육과 족발이 함께 들어있는 제품을 샀다. 기가 막힌 진수성찬. 잔잔한 겨울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천국이었다. "와.. 좋다." 짤막한 탄성에 수많은 감정이 섞여들었다. 눈이 뜨거워져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길. 정해진 길이 있다. 서울 둘레길, 해파랑길, 국토종주길 등-이 그렇다. 안전하게 정해져 있는 길을 선택해도 좋다. 사람들도 많이 다니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으니 큰 변수 없이 완주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정해지지 않은 길이 있다. 스스로 택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오로지 지도를 보고 만들어가는 길이다. 편의점, 음식점, 숙소의 정보는 없다. 직접 검색해 보고 어디까지 걸을지, 어디서 쉴지, 무엇을 먹을지 모든 것이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나아지는 중이다. 첫 국토종주는 4대강 자전거길이었지만 두 번째는 직접 해남까지 걸어갔고, 세 번째는 현재 전국 일주다.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우는 중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직접 만드는 중이다. 길을 잘못 들 때도 있고, 멀리 돌아갈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고자 하는 정확한 목적지가 있다면 결국은 도착한다. 멀리 돌아가는 중이라면 더 걸어가면 된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다시 돌아가 출발하거나, 목적지와 이어지는 샛길을 찾아가면 된다. 우리들은 수많은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들은 모두 이어져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끝은 있을지라도 끝나는 길은 없다. 끊임없이 걸어가자. 길도 잃어보고, 돌아가 보기도 하고, 잘못 들어서기도 해보자. 인생을 걷기에 비유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존재겠지만 오히려 어렵게 생각하니까 힘든 것이 아닐까. 'Simple is Best.'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방법을 찾고, 걷는 거야! 여기에는 성공의 크기를 결정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그걸로 된 거야.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