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난지 2주가 지났다. 드디어 내일, 강원도 고성에 도착한다. 걸어서 최북단 지역까지 왔다니 기분이 새롭다. 도착지점에 가까워지니 마음이 조금 해이해졌다. 걷는 길이 힘들게 느껴지고,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그렇게 걷는 중에 고민이 생겼다. 전국 일주 의미로 여러 지역을 걸어서 다닐 것인지, 아니면 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을 따라 한 바퀴를 돌 것인지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했다.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전자다. 사람들에게 가보고 싶은 곳을 추천받아 지역 명소를 찾아간다. 카페와 맛집도 좋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이제까지 못 가본 곳도, 가본 곳도 있지만 걸어서 간다는 점에서 재밌었다. 코리아 둘레길을 걷는다면 사람을 초대해 같이 걷는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 '세바시 인생 질문' 책 속의 질문을 몇 개 적어왔다. 함께 고민하면서 걷는다면 내적으로 풍부한 도보여행이 될 것 같았다. 걷다 보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걷다보니 꽃잎이 머리속에 흩날렸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생각들이었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에서 말했다.
‘길을 걷고 있노라면, 그동안 매몰되어 있던 소망과 자유에 대한 꿈들이 다시 솟아난다. 그리고 부질없는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가능성들이 용기만 갖는다면 실제로 가능하리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나의 상상이 현실이 되리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분명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걸으면서 자신감이 쌓여가고, 쌓인 자신감은 거대한 용기를 부를 것이다. 난 걷기가 가진 힘을 믿는다.
정상에 도착했다. 진부령은 높이 529m이며, 백두대간에 속한다. 진부령에는 미술관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미술관이 있어 신기했다. 이곳은 처음에 간성읍 흘리 출장소 건물이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영화제작 등을 하던 전석진씨가 1985년 즈음부터 여행차 진부령을 오다가다 작은 집과 텃밭을 준비해두고 별장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1997년, 출장소가 폐쇄되었고 전 씨는 이곳을 미술관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고성군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사비를 들여 건물을 임대한 뒤, 처음에는 '진부령문화스튜디오'로 개관했다. 1999년 10월 29일 이중섭 전시회를 열면서 진부령에 미술공간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라고 한다.
진부령에서 내려오는 길은 아찔했다. 높이도 아찔했지만 갓길이 좁아 바로 옆으로 자동차가 지나갔다. 도로를 따라 걷는 경우가 흔한데, 자동차와 반대방향보다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안전하다(사실 어떻게 하든 위험하기 마찬가지다, 자동차가 문제가 없기를 기도해야 한다). 안전선을 최대한 넘지 말고 안쪽에서 걷기를 추천하지만, 되도록이면 도로는 피하는 편이 좋다. 진부령 유원지를 지나 소똥령 마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