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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Oct 07. 2024

EP.19 고성->양양 28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양양으로 가는 길은 해변의 연속이었다. 해수욕장은 출입을 제한했다. 긴 줄로 입구를 막고 유료 데크 사용을 막기 위해 구역을 폐쇄했다. 비성수기의 바다는 아무도 찾지 않고, 나도 혼자였다. 그러다 보니 우린 좋은 단짝으로 알맞았다. 바다에겐 관객이 생겼으며, 내겐 드넓은 품이 생겼다. 외로움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거침을, 그는 나의 위태로움을 알아줄 테니.

아야진 항구를 지나 봉포 해변에 도착했다. 하얀색 푸드트럭이 보였다. 그것이 이전에 보았던 푸드트럭임을 기억해 내자 그때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흐릿한 기억이었다. 안개를 걷어가며 그때의 풍경을 찾아간다면 기억이 선명해지겠지만, 한낱 추억일 뿐 대단한 노력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여기가 거기였구나’ 하고 피식 웃는 역할이면 충분했다. 추억도 추억 나름이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이라면 두고두고 꺼내 볼 텐데, 빛바랜 행복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 간직하지 않았다. 이 추억은 조심스러우므로 그냥 스쳐 가는 것이 편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렸다. 잠시 후, 많은 '좋아요' 수가 달렸다. ‘혹시나 알아보셨나?’ 식판을 반납하러 갔다.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았다. "큰 건 아니지만 여행하면서 당 떨어지지 않게 먹어요." 건네받은 것은 사탕이었다.

금강대교와 설악대교를 지났다. 다리 너머로 갯배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풍경을 가보지도 못한 외국에 비유하는 것이 과연 맞을지 싶지만, 이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법은 없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연상시키게 했다. 한국인 고유의 특성일까? 우리나라 사람은 해외에서 국내 풍경을 연상하고, 국내서 해외 풍경을 연상한다. 여행프로그램을 보다가 “어? 저기 완전 남해 해안도로인데?”, 나도 틀림없는 한국인이다.

속초에 오면 꼭 먹는 음식이 있다. 바로 물회다. 오후 2시 30분, <청초수물회> 본점에 도착했다. 하필 토요일이라 대기팀이 많았다. 95팀. 저녁이 돼서야 먹을 것 같아 포장했다. 포장한 물회를 들고 속초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어제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얼죽아 세대로서 당당히 물회를 꺼냈다. 머리에 종이 수시로 울렸다. ‘띵-’,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먹는 물회는 차갑다를 넘어 추웠다. 오들오들 떨며 물회를 먹는데, 지나가는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오히려 자유로웠다. 거지 같다는 생각을 해도 좋았을 것이다. 음식을 식당에서만 먹으라는 법은 없다. 길이 곧 내게 식당이다. 내가 앉는 곳이 명소고, 맛집이다. 돈 내고 보러 가는 자연 풍경이 공짜다. 이것이 방랑자의 특권이다. 오늘의 길식당은 대관람차 아래 무대 시설이었다. 시원함은 추움으로 변해갔지만, 가을 끝자락을 느낀다고 생각하니 좋았다.

물치해수욕장을 지났다.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이 보였다. 서핑 좀 배웠다고 몸이 근질거렸다. 추워지기 전에 서핑을 더 탈지 고민했지만, 곧바로 접었다. 바다는 역시 멀리서 바라보는 게 좋았다. 낙산해수욕장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걷는 사람은 고독한 자로 세상을 탐구하는 사람이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고독이 힘들었다. 그것에 빠졌을 때 더 이상 ‘사회적 동물’로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싶었다. 영화 <IN TO THE WILD>가 떠올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주인공은 사회를 떠나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의 행위는 내게 엄청난 떨림을 주었고,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위험한 생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죽음 앞에 그가 떠올린 기억은 다정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평범한 생활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행복은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


라는 거대한 답을 남겨놓은 채 끝난 영화에 나는 나만의 답을 찾고 싶었다. 안정된 삶을 벗어던지고 길로 떠난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갈까, 아니면 고독한 삶에 익숙해져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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