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나는 생각한다. 고로 글을 쓴다.

예술가의 철학 탐구

by 하은수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보고 웃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철학을 모르더라도 이 제목의 원형을 대부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가 ‘방법서설’에 남긴 시대를 초월한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를 내 자신만의 철학으로 응용하여 변형시킨 제목이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2학기에 철학과 미학 수업을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 수업은 필수 교양 과목이라 모두가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철학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안다. 매우 어려운 과목이라는 것을. 누구나 수업을 들을 수는 있지만 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과목이라는 것을. 나 또한 매우 어려웠다. 특히 이해도 안되는 영어로 배우니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미국 대학교에 3년 째 다니던 시기라 영어가 편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학문적인 용어로는 아직 어려운 시기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어렵다. 오히려 영어로 알던 것을 한글로 번역하고 풀어서 설명하려고 하니 머리에 큰 돌에 생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왜 철학이 재밌는가?

철학, 정확하게는 서양철학을 처음 배울 때 교수님이 소개를 해주신 원어의 의미를 들었을때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Philosophy를 구성하는 두 단어, Philo와 Sophia를 해석하면 ‘지혜를 사랑하다’라고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즉, 철학의 근본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지혜에 집착을 했었다. 지금도 그렇다고 표현할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학업에 담을 넘어 아예 벽을 세우고 청소년기를 살았다. 부모님은 학교 선생님 이셔서 공부에 함부로 담을 쌓기가 어려웠다. 특히 부모님이 일하시는 학교를 다니면 더욱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학업과 성적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걱정과 근심만 남겨 줬다. 개인적으로 많이 후회한다. 학업 공부와 과제가 어려울때 아버지께서 항상 상기시켜 주신 성경 구절이 있다. 야고보서에서 저자는 지혜가 없을때 신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하며 자신의 서신을 시작한다. 신은 우리가 지혜를 구할때 후회 없이 주신다고 야고보서의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나의 학창 시절 때문인가 나는 지혜에 집착하기 시작고 지혜를 끊임 없이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갈망을 쫓아 도달한 곳이 철학과 신학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지혜와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별반 다를게 없다. 아마 다들 이 말을 들으면 많이들 놀랄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다수의 신을 숭배하는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에서 비롯된 철학이 어떻게 유일신을 가르치는 책과 비슷할 수가 있는가?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초기에 기독교 사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한 중동 사람들이 모여서 고대 그리스어 (정확히 헬라어)로 복음과 서신을 주고 받는 종교 집단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에 와서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정리할때 참고한 다수의 개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나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중 ‘형이상학’ (Metaphysica)를 읽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원칙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형이상학을 시작한다. 정확히 말해 철학은 지혜에 대한 학문이고 지혜는 가장 근본 또는 근원이 되는 원칙을 탐구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나중에 자신의 스승의 ‘제1철학’을 모아서 만든 책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혜는 ‘존재의 근본’과 ‘근본의 원칙’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과 어떻게 비슷한가?

성경은 한권의 책이 아닌 여러개의 고대 문헌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서 이다 (Bible의 원어 또한 고대 그리스어로 ‘책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중 잠언서, 지혜를 다루는 책을 읽어보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명철은 선하신 분을 아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즉, 세상과 만물을 창조한 신을 경외하고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고대에 초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책들을 모아 만들어진 책이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참 후에 모여진 책이다. 물론 잠언서 그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참 전에 쓰여진 고대 문헌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고 있을 확률은 현저히 낮다. 그럼 우연일까? 개인적으로 논리적인 설명은 아닌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준 사람은 플라톤이다. 즉, 플라톤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세상은 창조되었음을 자신의 제자들에세 가르쳤고 그 가르침의 유산이 아리스토텔레스 인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형이상학은 현대 철학에 토대가 된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 글의 제목은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비롯 되었다. 데카르트는 현대 철학의 선구자라고 많이들 해석한다. 철학을 아직 배우고 있는 입장에서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발언이 사실인가? 사람은 진정 동물과는 남다른 생명체임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지성은 우리를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인간을 특별하게 분류를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바로 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고대에 살던 사람과 삼백년 전에 살던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생각이 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와 비슷하면서 다르게 철학서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 이상의 지혜를 남겨 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루지 못한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씀 중에 하나가 깨달음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시작과 끝이 뚜렷한 존재이다. 그 반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한계는 없다. 우리의 몸이 멈추고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그 때가 아마 우리의 깨달음의 끝이 아닐까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죽음은 참으로 삶을 허무하게 만든다. 전정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뚱아리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있다. 바로 기억이다. 누군가가 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 아닌 어떠한 흔적으로 남겨진 기억, 그것이 나의 작품이든 나의 언행이든 나의 흔적을 가지고 나를 기억해 줄 것이다. 그 많고 많은 흔적중 가장 오래 남을 흔적이 내가 남긴 나의 생각과 삶을 기록한 글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은 기억을 넘어 누군가에게는 깨달음을 주리라 소원한다. 이것이 글, 특히 철학적 글의 근본적인 역할 인 것 같다.

인간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또는 행동에 투자를 한다. 그 중에 흔하게 가치를 두는 것이 지식과 지혜이다. 우리를 대학교에서 괴롭힌 이미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깨달음과 지식이 그 어느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글로 자신의 깨달음을 남겼다. 물론 가치판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그들이 남겨준 것이 지혜와 지식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말 복받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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