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하지 일주일 지나 감자를 캡니다. 호미 한자루에 엉덩이 의자를 몸에 달고, 이랑 머리부터 처근차근 황금빛 녹말덩어리를 흙속에서 꺼내기 시작합니다.
물빠짐이 좋지 않은 구간에서 타원형 형태로 빈 공간이 계속 나타납니다. 제때 캐지 않아 주인을 기다리지 못하고 썩고 녹아버린 감자가 있던 곳입니다. 제법 큼직하게 씨알 굵은 사이즈의 공간을 보니, 괜히 비소식 든 일기예보와 임대할 트렉터 섭외가 어렵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며 늑장 부린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감자칩 원료인 두백 품종은 쪄내면 포슬포슬 부서지는 맛이 일품인데, 벌써 대기업 가공원물로 출하계약이 된 대형 밭들의 수확이 먼저라 기계농들은 애매한 소농의 수확시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강소농이니 스마트강소농이니 알 길 없는 부지런한 농군의 손이 더 빠르게 감자를 구해냅니다.
삼일쯤 썩은 감자와 썩을 감자를 추려내가며 대여섯 이랑 작업을 마치니 온몸이 부서질 듯 천근만근입니다. 미국서 살다 온 먼 마을의 어느 기독교인은 이 부질없는 물질의 탐욕에 사서 고생하며 애쓰는 인생들의 모습이 무척 측은한가 봅니다. 날마다 콩음료와 과일을 사 들고와 일을 돕는다며 풀뽑기를 하다 지쳤는지 정작 감자캐는 동안엔 그림자도 뵈질 않습니다.
감자캐기 사일 째, 드디어 감자캐는 도구를 단 트렉터와 보조인력이 도착합니다. 훈련된 외국인 두 명이 능숙하게 호흡을 맞춰 수십 이랑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고 갑니다. 드러난 감자들을 주워 담는 일도 생각보다 만만찮은 일입니다. 미처 골라내지 못한 썩은 놈과 썩을 놈 때문에 순식간에 애써 들여 놓은 창고에서도 금새 악취로 벌레들을 유혹하며 썩음 대열에 합류하는 감자들이 속츌합니다. 농산물은 선별 과정이 중요한데, 수분과 빛 조도에 민감한 감자는 유독 더 그러합니다.
근육통을 부를만큼 단단하고 묵직하게 살진 감자가 허무하게 물이 되고 독이 되고 악취를 풍기며 폐기되거나, 기계에 잘리거나 기계 수평아래에 묻혀 아예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지렁이와 벌레,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에서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전도자의 탄식이 절로 떠오릅니다.
한낮의 이상고온이 지속되어 며칠간 좀 더 꼼꼼히 마무리 해야하는 밭의 잔여 작업도 포기하고, 수분이 많아 선별 중에 늘어난 폐기 물량도 미련없이 안전한 저장고행을 포기합니다. 절반 쯤으로 줄어들어 버린 수확량이지만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감자를 캐고, 감자를 먹는’ 명화 속 사람들의 심정으로 마음을 정리합니다.
마른 근육에 뼛속까지 욱씬거리게 만든 무서운 불량감자들을 처리하는 동안 마음의 허무와 노동의 고통이 몸에서 사라지는 만큼 당장 이 포슬포슬한 햇감자 맛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슬슬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탁탁 파리채를 휘두르는 나른한 여름 오후, 칠월의 달개비와 봉숭아도 때마침 새 얼굴을 보여줍니다.
계엄부터 계엄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어느새 녹아 사라진 썩은 감자처럼 텅 빈 허무의 블랙홀 저너머로 사라지고, 기디림의 종말을 견딘 단단한 웃음이 그을린 황금빛 피부에서 피어납니다.
하지에는 감자를 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