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휘날리는 하얀 2월, 한낮의 꿈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어 놓지 않으면, 구워 먹어 버리겠다.
토끼야, 작은 토끼야, 간이나 내어다오. 세 개나 굴을 파고, 어디 숨었니? 눈보라 희다고 안보일쏘냐!
깡총깡총 뛰는 것이 오도방정 따로 없다. 빨간 눈 하고 쫄아 숨은 주제에 누굴 계몽하려는 게야. (세 마리의 토끼가 세 개의 굴을 팠기 때문에, 거북이는 어리둥절. 거북이 수영대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보니 이 판은 토끼가 발 디딜 틈 없이 쫘악 깔린 거북지뢰 밭.)
토끼와 거북이가 제각각 열심히 서로를 추궁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데, "입춘한파도 ... 막판 스퍼트"라며 미야기 호쿠다이발(發) 산토리니 지진소식부터 전해주는 소박사의 똑똑 떨어지는 밀리터리 딕션이 오히려 감미롭다. (이런 때의 눈보라와 강력한파를 몰고 오는 찬 바람은 어린 시절의 '설', 그리고 '정월대보름'의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새벽 두시가 넘어선 시각 삑삑거리는 소음에 눈을 떴더니, 충주 어딘가에 진도 4.2정도 지진이 발생했다는 경보였다. 잠결에 본 숫자라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3.1로 된 뉴스들이 나온다. 두 잔의 커피를 한꺼번에 타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동장군이 까탈을 부리고, 주군이 가오(かお, 顔)를 잡는다. 일상에 관계없이, 가끔은 그리웠을 이런 날씨.
휴식을 틈타, 프리마인 셈 치고 커피타임에 털어 넣는다.
폭설 한창인 '설'이 돌아오면, 며느리들은 제 집에서 제 나름 둥근 소반, 사각 소반에 각각 상을 차렸다. 얌전히 솜씨를 발휘하고, 그 많은 음식들이 놓인 상에 보를 덮어 머리에 얹는다. 시댁 큰집으로 각각의 '설 떡국 상'을 이고 아이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르르 몰고 조심조심 눈길을 지나 세배를 가는 길. 지금 다시 생각하면 몹시도 낯설고 특별한 풍경이다. 다섯 며느리 상을 받고 매의 눈으로 스캔하는 시모의 위엄이란!
조청에 쑥떡이며, 약과, 산자, 유과, 실고추 썰어 올린 갖은 찐 생선에 낙지호롱, 양념재워 불에 구운 고기산적, 각색 나물과 고기 전... 밤새 손으로 썰어 꾸덕하게 두었다가 뼈까지 다져 재래식 짠 간장에 볶은 닭장을 넣고 끓여 희고 노란 지단을 올린 흰 떡국... 누가 누가 더 솜씨 좋은 지 연말 시상식겸 새로운 시작을 위한 농한기 최대 축제가 시작되는 날... 고드름 따서 칼싸움 하며 몰려다니는 사내 아이들에게 이따위 추위, 이 정도 폭설은 그저 조명과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아름다운 무대 세팅에 불과했다. 떠들썩한 설렘으로 온 몸에, 온 마을에 강도 9.0의 진동이 가득하던 아득하게 먼 시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구신은 뭐하고 있을까.
아홉이란 숫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다 이루었거나, 다 지나갔거나, 백조처럼 황홀한 세상이 오기 전 천지현황우주홍황 아득한 세계 편만한 구름 낀 언덕 위에서, 야곱의 편대처럼 먼 발치서 오고 있는 개차신발 사대오상을 지켜보는 아홉 장군 마냥 느긋하고 날카롭다.
왁자지껄 하던 시절은 가고 오지 않지만, 커피 잔에 남은 따스한 온기처럼 미미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새로운 힘을 북돋는다. 순(筍)을 기다리는 마음에, 움(um)트는 싹(ssack)을 본 듯한 아슬아슬한 촉(chock)이랄까.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강하고, 착각이라고 털어버릴 정도로 금새 사라지는 마법의 순간이 지나가고, 이제 뻣뻣하기 그지 없는 메마른 오후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깨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