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되지만, 신성한 삶
희뿌옇게 흐린 공기를 가르며 떠오르는 해가 예쁘다.
쌓여 녹지 않은 눈으로 가득한 들, 끊어질 듯 아름답게 이어지는 크고 작은 능선들...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두운 새벽이라 해야 할 시각. 잔잔한 여의도의 불빛을 지나 기차역에 도착한다.
우유거품이 든 스팀피처를 탁탁 내리친 다음 스푼으로 한번씩 떠 담는 까페직원의 손동작을 한참 구경한다. 즐거움이라곤 느낄 수 없는 기계적인 동작이지만, 주문한대로 시나몬 가루까지 착착 뿌려 내주는 카푸치노에 그녀의 정성이 담겨 있음을 안다. 홀더가 빠졌다며 부르는 소리에 "괜찮아요"를 외치곤 차가운 두 손을 종이컵에 비벼 녹이며, 조금 늦는 기차를 기다린다.
1997년 1월에 있었다는 막 인기가 치솟던 그룹 '자자'의 산악불사조부대 공연 영상을 보았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맨땅에 대열을 지어 앉아 있는 군인들과 눈 쌓인 무대 위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안무하는 젊은 공연자들의 모습에 이런 저런 소회를 느껴본다. 그저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 정도만 알던 곡인데, 자자손손 활동하자며 지었다는 그룹 이름이 뭉클하다. 메인 보컬이라는 여성가수는 1976년 생이란다. 동생과 나이가 같다. 초중학생 때, 주말이면 대중가요를 소개하는 음악프로그램 시청에 열중하던 동생이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존경한다. 사회가 병들지 않게 열심히 살아와 준 사람들...
그러고 보니, 처음 해외를 나간 것이 그해 겨울이다. 하얀 눈과 얼음장 만드는 시린 찬바람을 좋아하던 내게 봄과 여름을 가르쳐 준 시간. 올 한파 덕분인지 누군가 올려놓은 알고리즘에 걸려나온 자자의 "버스안에서" 영상과 세부(Cebu)의 추억이 모로 세로 뇌리를 가로지른다. '키세스 군단'을 연상시킨 영상 속 군인들의 모습은 지금 군복무 중인 조카의 얼굴과 겹쳐 기차 차창 밖으로 한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산과 들 풍경 속에서도 어른거린다. 아무리 겹쳐 보려해도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가던 기차에서 한없이 바라보던 숲과 마을들은 틀린 그림을 끌어다 놓는 것처럼 다시 튕겨나간다. 와이파이 잘 터지는 편안한 KTX가 고맙다. 현실과 기억 사이에서 몸은 빠르게 공간을 이동 중이다.
안개인지 아직 간간이 흩날리는 눈발 때문인지 시야가 더욱 뿌옇게 흐려진다. 온도는 한참 누그러진 듯 하지만,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난 2월은 여전히 겨울이다. 97년 이후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물들었던 가슴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묵은 것들을 해치운다는 보름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다. (발렌타이 데이 달콤 쌉쓰름한 초컬릿은 덤이다.)
바젤의 카니발 날짜를 찾아보니 한달 뒤라고 한다.
모처럼 겨울 숲 처럼 차갑게 식힌 가슴이 시원하다.
머리 속도 그랬으면 좋겠다.
응달진 곳을 달리기 위해 택시가 속도를 늦춘다.
아직도 조금씩 눈발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