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컨신의 까멜리아
산차(山茶)나무 동백은 녹차의 사촌이나 오촌 쯤 된다(더라). 새벽 동이 틀 무렵, 위스컨신에서 폭설에 잠긴 동백꽃 사진이 날아든다. "My Camellias in the snow."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 글의 말미에 사진을 첨부하려고 한다. 무료했는지, 영국식 악센트가 묻어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배경에 깔린 눈내리는 영상도 하나 덤으로 받았다.
"That's the fate of the flower, calling (itself) as Winter-Green-White, (aka) 冬柏." 잠결에 고맙다는 의미로 아무렇게나 회신을 보낸다.
"They know."
까멜리아, 마이 까멜리아.
공효진과 강하늘의 "우리 동백이"가 있어 좋다.
이규보의 시 동백꽃이 있어서 좋다.
어린 시절 아랫집 담벼락 모퉁이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어서 좋았다. 올 설에도 잠깐 다니러 갔다가 그 옆으로 있는 빈 집의 담장 아래 떨어진 몇알의 동백씨를 주워다 어느 고운 집 베란다 위에 올려두고 온 것이 기억난다.
이미자의 서글프지만 아름다운 동백아가씨와 다산초당 가는 길 야생 산 녹차가 길잡이처럼 점점이 수놓아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이 있어 더 없이 좋다.
김유정의 봄봄에서 점순이가 맡았던 알싸한 노란 동백꽃 향기를 빼놓으면 섭하다. (강원도의 동백꽃은 노란 생강나무일 것이라고 한다. 생강나무든, 빨간 꽃 속에 묻은 노란 꽃술가루든 좋다. 중요한 건 점순이의 사랑을 꿈꾸던 나, 김유정이다.)
붉은 똥바이-화(冬柏花)가 하얀 녹차꽃의 사촌 쯤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아마 2017년 경 칭따오 어느 신문에 난 봄 소식 기사를 읽었을 때였던 것 같다. 중국과 일본에 '동백'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잠시 가벼운 충격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회심의 누룩이 온 가슴에 뻐근하게 벅차오른다. 그 두 이웃나라에서 동백을 부르는 이름은 공히 '산차' - 산에서 나는 녹차 정도다. (일본에서 부르는 쓰바키, 츠바키, 椿이 동백을 뜻하고, 산차화는 이와 이주 유사한 그러나 살짝 다른 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춘‘자는 참죽나무, 까죽나물로 한자의 쓰임이 또 다르다고 한다. 까멜리아는 봄꽃일까, 겨울꽃일까?)
칭따오발 신문의 기사는 (도(道, Taoism)가의 본산으로 꼽히는) 라오샨(勞山) 바위 언저리 눈속에 핀 핀 동백을 칭송하며 봄을 기다리는 짧고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브런치 스토리에 쓸 글의 소재가 떨어지지 않는 요즘이 즐겁다.
기원 전 춘추시대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을지도 모를 20살 연상의 대선배(라고 가정하고), 라오쯔(老子), 즉 노자 선생은 우주만물의 이치를 '도'라 이름했다 한다. 이이(이담)인지, 노래자인지, 태사담인지, 누가 노자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매자는 이런 부분은 속 편하게 그냥 넘어간다. 뭉뚱그려 '옛 사람' 또는 '옛 사람들'이라고 한들 누가 알까. 요즘 많은 사람들의 놀란 가슴에 위로를 주는 몇몇 엘리트들의 모습에서 보듯, 비씨이(BCE) 4~500년경 언저리의 그 또는 그들은 인(仁)과 예(禮)의 적절한 온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던 듯 싶다. 그 직관의 끝자락을 잡고 수백 년 뒤에 장자의 나비와 물고기가 꿈처럼 날아다녔다는 것, 그 정도를 '노장사상' 아닐까 짐작해 보는 평범자는 그저 입맛에 맞는 '간'의 정도와 온도, 습도, 속도, 당도에 웃고 울 뿐이다.
훗날 광개토왕과 백제, 가야가 한반도가 좁다며 마구 이런저런 역사를 쓰고 있을 당시, 환갑이 넘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사막을 헤매고 스리랑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풍랑에 이리저리 밀려 자바섬이며 산동성 칭따오 바위섬을 헤매다 겨우 홀로 돌아와 남경에 자리잡은 법현스님이 근 십여년 (CE 412~422) 쓰다 남기고 갔다는 저술들이 관심을 끈다.
그럴 수 밖에.
어쩌다 도교의 본산이 된 칭따오 라오샨 언저리를 다녀온 적이 있다. 라오샨 뤼차(綠茶)가 유명했기 때문에 가까운 크라운 호텔에서 막 항조우에서 도착하신 여사님들의 시중을 들며, 자처한 관광가이드로서 욕심을 내어 본 것이다. 라오쯔, 라오샨... 그럴싸한 이름에 끌렸을 뿐, 여러 차례 기회가 있어도 아주 살짝 근처까지만 갔던 곳. 롱징(龍井)에서 이미 황제가 어쩌고 하는 비싼 롱징차를 관광객 프리미엄을 얹어주고 구입한 뒤라서, 그냥 없던 일로 한다.
법현이 스쳐가서인지, 그곳에 이미 터를 잡아 도교 집대성의 위용을 자랑하던 동시대인 구겸지의 오롯한 공로인지 칭따오 라오샨의 바위 곳곳은 당시 '맑음'을 숭상하는 '하늘'의 신선들이 모여 도를 닦는 도교타운이었다고 한다. 그가 도를 깨우쳤다는 숭산(嵩山)... 쑹샨.... 어디서 스쳤을까... 산동성 어디 있던 산인지, 그 유명한 오악 중 하나라는 낙양의 숭산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스쳐간 많은 기억들은 이미 뇌리 으슥한 한 구석에서 통째로 몽땅 곱게 슬어가는 중이다. 5세기 당시에 살았더라면, 산동성 바닷가 바위 틈에서 천사를 찾고 신선을 찾으며 '북쪽의 나라를 위한 종교'에 귀의하기 보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국토개발 사업에 일용직 막노동꾼으로 잔업수당을 타 막걸리를 마시는 쪽을 더 선호했을 것 같다.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 온 불교학자를 은근 흠모하고 또 질투했을 지도 모르는 구 도사의 후예들은 '징기스칸'의 책사가 된다.
13세기 라오샨에서 출발한 치샤 출신의 장춘도사 구모씨 일행이 1218~1219년경 서요라 불리던 키르키즈스탄 지역을 막 점령한 징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아프가니스탄 언저리로 출장 서비스를 떠나 '글로벌 포용적 리더십'에 결정적인 정책 비선 역할을 했다는데, 전쟁과 문화적 충돌이 빗발치는 그즈음의 코리아 내부 상황은 정말 흥미롭다.
1212년에 즉위한 고종의 45년 10개월 재위 기간 동안 이전부터 시작된 최씨 4대 정권이 실권을 쥐고 있었고, 20년 정도 흘렀을 때 아예 강화도로 옮겨가 39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새겼으며, 1270년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는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자취를 감추어 어렴풋이 일본 언저리를 맴돌았을 것 같은 삼별초 말굽소리를 따라가면, 어쩐지 눈속에 피었던 동백꽃 향기도 남풍에 실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닷길 따라 저 멀리 사르데냐 섬에 뚝 떨어져 삭힌 엔쵸비 통에 숨어있다가 수백 년이 지난 어느날 코르시카의 영웅 나폴레옹의 옷자락을 스치고 마르세이유에서 짐을 내리는 에드몽 당테스의 땀방울을 타고 파리에 입성했을 것만 같다. 꼭 요즘의 헌재 재판 시리즈가 데자뷔 되는 듯한 몽떼 끄리스또 백작의 꿈같은 이야기가 용두사미처럼 만나는 장면을 나름 장자풍으로 한번 그려보는 것이다.
라오샨의 눈속에 핀 동백꽃 이야기를 뒹국어로 읽은 날, 여수나 해남의 동백꽃이 부르라이또 요코하마를 거쳐 뒤마의 동백이가 되었다가 결국 불꽃처럼 팡팡터지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이규보 선생을 붙들고 혼자 부득부득 우겨보았더랬다. 2019년 순수한 경찰 용식이가 용감무쌍하게 사랑한 우리 동백씨 필구엄마는 일제시대 센다이 출신 펜클럽 회장이 지었다는 '까멜리아 콤플렉스'를 갖다 붙이기엔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다. 부드럽고 강인하고 자유로울 뿐, 구구절절하지 않고 담백하다.
Winter Green-White, the flower that knows own fate. 오늘 아침 위스컨신에서 날아 온 사진 한장에 이렇게나 긴 글을 쓰게 된다.
도가의 노장사상이 종교가 되고, 어지러운 시절 어느 나라의 국교가 되었다는 도교 도장의 본산 칭따오 라오샨취에는 완벽한 이상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도를 닦는 '삼청학교'가 있다고 한다. 옥청, 상청, 태청의 삼청궁이라고 불린다. 어쩐지 허경영의 하늘궁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천공이니 하는 이름들과 심산유곡마다 '기'를 연마하는 도사, 법사들이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고 보국강녕의 기도를 올리는 일이 이런 데 뿌리를 둔 것인가... 하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일말의 느낌이 쎄-하게 왔다가 그냥 가버린다. 공부가 매우 부족할 뿐 아니라, 아예 소질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뒷꼭지를 똑 따서 쪽쪽 빨아보면 단물이 찔금 느껴지던 동백꽃이 좋은 것이다.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면 비녀를 꽂아 쪽진 머리가 단정해진다는 씨앗이 좋은 것이다.
살얼음 추위로 살살 약을 올리는 겨울 끝자락 찬바람이 곧 누그러진 훈풍으로 바뀔 것이라는 시린 기다림이 좋은 것이다. 그 나무에 깃든 동박새가 이쁜 것이다.
사철 푸른 나무에 달렸다가, 한닢 한닢 흩어지디 않고 붉은 빛 온전할 제 통째로 툭툭- 땅에 떨어지는 그 꽃이 비장하고 독특하여 좋은 것이다.
눈보라에 당당하고 햇살에 마음껏 빛나더니, 멍 자욱 하나 없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제 갈 길 깔끔히 떠나니 더 없이 멋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