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있는 이유
작년,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이래 처음으로 연간 관중 1,000만 명을 돌파했다. 10개 구단 체제로 리그가 시작된 지 10년 만의 일이다. 일주일에 6일이나 경기가 열리고, 평일에는 퇴근 시간에 맞춰 시작되니 직장인 입장에서 이보다 더 시청하기 좋은 스포츠가 있을까. 실제로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틀어놓은 식당이나 주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TV 화면 속에서는 선수가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야구를 오래 지켜본 팬이라면 선수마다 반복되는 특유의 동작이나 루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에는 특이한 루틴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장갑 벨크로를 떼고 붙이며 시작한다. 그리고 점프를 두 번 하는데 공중에서 발을 모으며 신발을 탁탁 터는 듯한 모션이 따라오고, 왼손으로 헬멧을 벗어 앞머리를 두 번 뒤로 쓸어 넘긴 후 다시 쓴다. 방망이를 쥐는가 싶더니 왼다리를 무심하게 툭 쳐줌과 동시에 양 발을 타격 자세만큼 벌린다. 홈플레이트 앞을 방망이로 선을 한 번 그어준 다음 빈 스윙을 하고 나면 마침내 타격 준비가 끝난다. 현재는 은퇴한 박한이 선수의 이 루틴은 무려 20초가 걸린다.
선수가 루틴을 반복하는 이유는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야구에서는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타자가 타격 준비를 하는 모든 행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대로 투수 역시 마운드에서 나름의 루틴을 가지고 있다. 타이밍을 뺏거나 심리전을 벌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루틴은 단체 스포츠인 야구에서 경기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골프는 야구와 달리, 정지된 공을 타격하는 스포츠다. 날아오는 공을 치는 야구보다 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골프채를 잡고 바닥에 놓인 공을 치려 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 보면, 결코 쉽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가? 공 크기만 작다 뿐이지 가만히 있는 공도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는 걸 깨닫게 해 준다.
공을 어떻게 타격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히 원하는 곳으로 공을 보내는 건 프로 선수에게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미스샷을 줄이고, 일관된 스윙으로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프리샷 루틴을 고수한다. 루틴이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기 힘든 선수도 있고,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루틴을 가진 선수도 있다.
스웨덴출신 골퍼 루드비그 오베리는 티 박스에서 보여주는 프리샷 루틴이 간결하지만 명확하다. 티를 꽂고 어드레스 자세를 취한다. 불필요한 빈 스윙 없이 클럽 페이스가 올바르게 정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테이크어웨이 동작을 점검한다. 이후 랜딩 지점을 한 번 바라보고, 클럽 헤드를 땅에 한 번 살짝 찍고 나서 바로 공을 타격한다. 샷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5초 정도. 오베리가 투어에서 드라이버 비거리와 정확도 부문에서 뛰어난 수치를 보여주는 데는 이러한 효율적이고 일관된 루틴 덕분이다.
모든 선수는 자신만의 루틴을 갖고 있지만, 그 루틴이 평생 지속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날씨, 컨디션, 대회 환경 등 다양한 변수에 맞춰 새로운 루틴이 추가되거나 변화하기도 한다.
최근 열린 KPGA 투어 백송홀딩스-아시아드 CC 부산오픈에서 김홍택 선수는 티샷을 하기 전 캐디로부터 생수를 건네받아 수분을 보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덥지근하고 습한 날씨 속에서도 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일종의 심리적 장치로 보였다. 이런 루틴이 설정된 상태에서 빠뜨리거나 생략된다면, 선수는 쉽게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티샷이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을 경우, 루틴을 지키지 않았던 사실이 자책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심리적 압박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김홍택 선수는 루틴을 꾸준히 실행했고, 그 결과 이번 시즌 첫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루틴이 길고 복잡한 선수도 있다. 마스터스에서 두 차례 정상에 오른 스페인의 전설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은 어드레스에 들어간 뒤 낙하지점, 핀, 목표물과 볼을 수차례 번갈아 쳐다보며 타격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다. 이는 김주형 선수와도 유사한데, 최근 그는 슬로 플레이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대회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3명이 한 조로 플레이하는 골프에서는 한 명의 지나치게 긴 루틴이 같은 조 선수는 물론, 뒤따라 경기를 이어가는 다른 조 선수들, 중계진, 갤러리까지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일정 지연은 전체 경기 흐름을 무너뜨릴 수 있고, 결국 선수 한 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논란 이후 김주형은 정신적인 문제로 입스가 왔음을 밝혔고, 자신의 루틴과 플레이 템포를 조정해 나갔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각 투어와 협회들도 벌타 혹은 경고 등, 슬로 플레이 방지를 위한 정책을 점차 강화하고 있다.
루틴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한 '자기만의 순서'다. 반복되는 동작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자신감을 쌓으며, 예측 가능한 리듬을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순서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루틴은 습관이라는 틀을 넘어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요소로 바뀔 수 있다. 야구든 골프든, 루틴은 경기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경기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탱하는 균형감 있는 루틴, 그것이 진짜 ‘자기만의 순서’를 가진 선수로 거듭날 수 있다.
루틴이 쌓여 우승컵을 들어 올리듯, 우리가 무심결에 행하는 동작들 또한 위대한 목적을 위한 루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