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골프 위상
골프는 상류층 스포츠라는 인식이 아직도 강하다. 과거보다 진입장벽이 낮아졌지만, 필드에서 첫 티 샷을 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아프리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빈곤과 열악한 환경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골프와 아프리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들린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골프 강국이다. 세계 골프 역사에서 남아공만큼 꾸준히 챔피언을 배출한 나라도 드물다. 사파리와 다이아몬드로 잘 알려진 이곳은 아프리카 대륙의 골프 수도라 불린다.
남아공에서의 첫 골프는 케이프 식민지로 건너온 영국인들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영국 장교들과 이주민들은 익숙한 여가 문화를 새로운 땅에도 그대로 가져왔고, 그 가운데 하나가 골프였다. 1885년 11월 14일, 케이프타운 인근에서 당시 영국 육군 장교인 헨리 도일리 토렌스 중장이 주도해 남아공 최초의 정식 골프장이 세워졌다. 무려 140년 역사를 지닌 로열 케이프 골프클럽이다. 이 작은 골프장은 식민지의 단순한 여가 공간을 넘어, 이후 남아공 골프의 뿌리가 되는 출발점이 된다.
로열 케이프 골프클럽을 시작으로 골프 문화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요하네스버그를 비롯해 포트 엘리자베스, 이스트 런던 등 주요 도시 곳곳에 새로운 골프장이 세워지며 남아공 골프의 기반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프라가 자리 잡자 자연스럽게 ‘경쟁의 장’이 필요해졌고, 자연스럽게 남아프리카공화국 오픈이라는 국가적 규모의 대회가 등장하게 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오픈은 1903년 처음 개최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 가운데 하나다. 포트 엘리자베스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는 스코틀랜드 출신 로리 워터스가 초대 챔피언에 오르며 대회의 막을 올렸고, 1921년에 이르러서야 남아공 국적의 첫 챔피언이 탄생했다.
이후 남아공 출신 선수들은 꾸준히 강세를 보이며 자국 골프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특히 ‘드라이버는 쇼, 퍼팅은 돈’이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보비 로크는 남아공 골프의 황금기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퍼팅 실력은 당대 최고였고, 1949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아일랜드의 해리 브래드쇼와 연장 승부 끝에 남아공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남아공 골프가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아공 골프는 이처럼 빠르게 성장하며 세계적인 골프 강국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했다.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이어진 이 인종차별 정책은 골프 역시 예외로 두지 않았다. 잘 갖춰진 골프장은 사실상 백인들의 전유물이자 놀이터였다. 흑인과 유색인종에겐 제한적으로 개방되었고, 허가된 몇몇 열악한 코스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남아공의 우수한 골프 인프라, 코치, 자본 등 모든 골프 관련 자원은 소수의 백인 사회에 집중되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흑인 골퍼가 있었더라도, 투어나 국제 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 골프는 뛰어난 성공 사례를 많이 배출했음에도, 그 기반은 극도로 편향된 사회 구조 위에 놓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가장 빼어난 기량으로 전 세계 각종 투어에서 우승을 밥먹듯이 해냈던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그랜드 슬래머 개리 플레이어다. 프로 통산 159승, 메이저 우승 9회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플레이어는, 국제무대에서 남아공을 대표하는 특급 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남아공의 인종차별 현실을 덮는 모순적인 역할과, 남아공 백인 정권의 정상적인 국가 이미지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 시절 개리 플레이어의 행보는 남아공 골프가 시대의 소용돌이와 얼마나 밀접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플레이어는 남아공 정부가 국제 스포츠계의 보이콧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홍보 조직인 ‘스포츠 공정성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골프계에서는 그가 정책을 옹호한다는 스탠스를 취하자, 공개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가들의 거센 항의 속에서도 계속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의 재능이 경기력뿐만 아니라, 어느새 국가 이미지와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심에서 활용된 것이었다.
오늘날 선샤인 투어로 알려진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남자 프로 골프 투어도 이 정책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1년 처음 설립되어 처음 20년 동안 백인 선수들에 한해서 출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정책이 폐지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골프를 육성하려는 프로그램이 확대되었고, 몇몇 선수들은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며 국제무대에 도전했다. 남아공 골프가 지금과 같은 다양성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러한 시대적 변곡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훗날 플레이어도 이 제도에 반하는 발언을 하며, 정부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지고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면서, 남아공 골프계도 큰 전환점을 맞았다. 골프장들은 공식적으로 인종 장벽을 허물고, 다방면에서 지원과 교육 프로그램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개리 플레이어의 시대가 저물며 어니 엘스가 남아공 골프의 새로운 얼굴로 떠올랐다. 두 선수의 재단은 수많은 유망주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과 유색인종 선수들에게 무료 레슨을 제공하는 등 ‘백인들의 스포츠’라는 오명을 지우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보비 로크에서부터 이어진 남아공의 골프 DNA는, 21세기에도 꾸준히 전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2008년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트레버 이멜만은 최전성기 시절의 타이거 우즈를 3타 차로 제치고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한다. 1978년 개리 플레이어가 우승한 지 정확히 30년 만이었다. 3년 뒤엔 찰 슈와첼이 우승하며 남아공 선수로서 3번째 우승자 명단에 오른다. 현재까지 메이저 대회 우승자는 7명이고, 총 22회 우승하여, 미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에 이어 가장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남아공은, 연중 온화한 기후와 기온을 자랑하며 화창한 햇살 아래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지상 낙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찬란한 햇살 아래에도 오래전 어두운 흔적이 남아 있었던 만큼 그 역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빈곤의 대륙 안에서 가장 이색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길목에서, 천천히 여명이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