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기록은 단 몇 초 만에 바뀌고, 수 십 년을 버텨내며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기록은 늘 성취의 결과물이자,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2025년의 골프는 기록과 시대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1. 21세기 최초, 25년 만에 찾아온 새로운 역사
올해 골프계를 통틀어 가장 뜨거웠던 장면이자, 오래도록 미뤄졌던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로리 매킬로이는 마지막 퍼즐이었던 마스터스 토너먼트를 제패하며, 21세기 최초의 커리어 그랜드 슬래머로 이름을 올렸다. 이 기록은 타이거 우즈가 달성한 이후 무려 25년 동안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었고, 매킬로이 역시 이 숙원을 위해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전과 좌절을 반복해야 했다. 2022년 준우승의 아픔을 뒤로한 채 3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저스틴 로즈와의 연장 접전 끝에 마침내 서사를 완성했다. 마스터스 18번 홀 그린에 새긴 역사는 단순한 우승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2. LIV골프 드디어 첫 상륙
지난 5월, 화면 속 이야기로만 존재하던 LIV 골프가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출범 이후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섰던 투어였지만, 첫 한국 대회는 관전의 대상이 아닌 현장이 됐다. 인천 송도에 위치한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서, 브라이슨 디섐보는 특유의 공격적인 플레이로 우승을 차지하며 여전히 LIV의 상징임을 증명했다. 올해 케빈 나가 이끄는 아이언헤드 GC에 합류한 장유빈은 공동 48위로 대회를 마쳤다. 성적 자체보다는, 이 대회가 한국 골프 산업과 선수들에게 던진 구조적인 질문이 더 많은 화제를 낳았다. 과연 LIV는 일시적인 이벤트였을지, 아니면 향후 아시아 골프의 새로운 선택지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 될지.
3. 마침내 새겨진 첫 승
이번 시즌 PGA 투어는 새로운 우승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유러피안 투어 8승에 빛나는 토미 플리트우드는 지난 8월 페덱스컵 투어 챔피언십에서 상금 1,000만 달러와 함께 드디어 커리어 첫 PGA 투어 우승을 신고했다. 같은 달 카메론 영 역시 윈덤 챔피언십 정상에 오르며 투어 입성 약 4년 만에 마침내 우승자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아온 호주 교포 이민우도 3월 텍사스 칠드런스 휴스턴 오픈에서 스코티 셰플러와 개리 우드랜드를 꺾고 PGA 투어 첫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들을 포함해 이번 시즌 투어 최초 우승자는 총 17명이다.
4. 제로토크 퍼터와 돌아온 미니 드라이버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미니 드라이버가, 그린 위에서는 제로 토크 퍼터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토미 플리트우드와 허인회는 드라이버 대신 미니 드라이버를 선택해 페어웨이 적중률을 끌어올렸고, 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린 위에서 보여준 JJ 스폰의 US오픈 챔피언 퍼트는 올해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헤드 회전을 최소화하는 제로토크 퍼터는 스트로크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했고, 메이저 대회라는 가혹한 무대에서 그 효과를 증명했다. 2025년은 장비가 더 멀리 보내는 도구가 아니라,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미국 '1 짱'들의 엇갈린 희비
골프 세계 랭킹 1위의 자리는 남녀 모두 작년과 변함이 없었다. 스코티 셰플러는 여전히 강했고 또다시 트로피를 휩쓸었다. 4년 연속 상금 1위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됨은 물론이고,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주말라운드에 나섰다. 메이저 우승 트로피도 챙기며 커리어 그랜드 슬램에도 마지막 퍼즐을 남겨놓고 있다. 반면 넬리 코다는 지난 8월 AIG 위민스 오픈 직후 지노 티티쿨에게 1위 자리를 내어주었다. 경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투어 전반적인 기량이 상향 평준화되며 우승트로피는 자연스럽게 여러 선수들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7승을 기록한 코다는 결국 트로피 하나 없이 한 해를 마무리했다.
6. 더 넓고, 더 큰 무대로
2024 시즌 KLPGA 상금 순위 1위를 기록하고, LPGA 투어 퀄리파잉 시리즈를 통과하며 미국 무대에 도전한 윤이나를 필두로 내년에도 두 명의 선수가 태평양을 건넌다. 10월에 열린 롯데 챔피언십에 초청 선수로 출전한 황유민이 깜짝 우승하면서 LPGA 직행 티켓을 따냈다. KLPGA에서 평균 드라이브 거리 1위에 올라선 이동은은 퀄리파잉 시리즈에서 공동 7위에 안착하며 출전 자격을 얻었다. 안정적인 국내 투어를 떠나 해외로 진출하는 데는 분명 리스크가 따른다.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받게 될 평가와 기록이 기대되는 내년이다.
7. 침묵이 길어지는 한국 남자 골프
2024 시즌에 이어 올해 역시 PGA투어 한국 남자 선수들의 우승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임성재, 김시우, 김주형 그리고 안병훈 등 주축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우승권 경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실상이다. 2023년 10월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에서 디펜딩 챔피언의 위엄을 보여주며 2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긴 김주형을 마지막으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선수들의 우승 소식이 끊겼다. 투어 챔피언십 7년 연속 출장이라는 위업의 임성재는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 시즌이 되었다.
8.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유럽팀
라이더컵은 여전히 미국과 유럽을 위한 무대다. 유럽팀은 202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대회에 이어, 이번 미국 원정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라이더컵 2연패를 달성했다.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는 조직력, 매치플레이에 최적화된 전략은 이번에도 유효했다. 반면 출전 선수 구성에 변화가 많았던 미국팀은 키건 브래들리가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단체전에서 좀처럼 흐름을 잡지 못했고, 홈경기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도를 넘은 미국 갤러리들의 야유 속에서도 유럽팀은 흔들리지 않았고, 13년 전처럼 적진을 다시 한번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9. 타이거 우즈에게 찾아온 황혼기
그는 숱한 부상은 물론 이혼과 스캔들, 가혹한 자동차 사고를 견뎌냈고, 올해는 정신적 지주였던 모친까지 떠나보냈다. 올 시즌 단 한 차례도 공식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채 이제는 시니어 투어를 고려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지만, 필드 위에서 그의 이름이 갖는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메이저 대회에서 뿜어낸 압도적인 존재감과 동료들이 보내는 경외심, 그리고 갤러리들의 시선은 그가 어떤 역사를 써 내려왔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필드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며, 은퇴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임을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다.
10. 평균타수 67타대, 다시 찾아올까
스코티 셰플러의 이번 시즌 평균타수는 68.131이다. PGA 투어 역사에서 이 구간은 언제나 특별했다. 평균타수 67타대는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2000,2007년)처럼 시대를 지배한 선수들만 허락받았던 영역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평균 69타 초반이면 투어 최상위권의 지표로 통했다. 하지만 상위권 선수들의 평균타수는 계속해서 낮아졌고, 69타대는 더 이상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장비의 진화와 데이터 기반 플레이는 샷의 오차를 줄였고, 코스 공략은 감각이 아닌 수치로 설계됐다. 이 흐름 속에서 67타대는 여전히 높은 벽이지만, 더 이상 비현실적인 기록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과 환경이 그 숫자를 향해 선수들을 밀어 올리고 있다.
2025년의 골프는 누군가에게는 수십 년을 기다려온 숙원의 완성이었고, 누군가에겐 한계에 다다른 몸을 이끌고 다시 시작점에 서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기록과 숫자가 시대를 가르는 냉정한 기준이 된 지금도, 필드 위에는 형용할 수 없는 거장의 위엄과 인간적인 투쟁이 공존한다. 영광은 머지않아 새로운 이름들로 교체되겠지만, 역경을 딛고 다시 코스에 서려는 집념은 골프라는 종목이 지닌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무너짐과 일어섬이 교차했던 올해의 필드는, 전설의 황혼마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