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멈추는 순간까지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문예반에 들어갔다. 몇 명의 아이들과 작고 낡은 책상에 앉아 담당 선생님이 내주는 주제를 생각그릇으로 하여 거기에 채울 단어들을 몽당연필로 누런 원고지에 꾹꾹 눌러썼다. 하지만 무엇을 썼는지는 기억이 없다.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는 당번을 맡은 적이 있다. 그 작은 도서관에 서 있던 나무로 만든 서가와 거기에 꽂힌 종이책, 그 냄새가 아련하다. 덕분에 책은 꽤 읽었지만 머리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이태리 독재자 무솔리니 자서전 제목 정도가 생각난다. 독서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대신 가끔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거기에 푹 빠졌다. <데미안>은 이 세상은 선과 악의 두 거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한 어조로 내게 소리쳤다. 선의 세계로 울타리를 친 나의 세계관이 변곡점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데미안>을 여섯 번은 읽은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 또 읽을 생각이다. 사관학교에서는 <한국문학단편>을 많이 읽었다. 글쓰기 과제도 많았다. 1980년 봄비 오는 날 생도호실에 앉아 원고지에 글을 쓰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논술시험도 많았다. 8절지 누런 시험지를 받아 들면 가로 세로로 접어 서론, 본론, 결론의 양을 가늠한 다음 접힌 세로의 선 자국을 따라 줄을 맞춰 글을 써 내려갔다. 이따금 본론 내용이 많아져 결론이 뒷면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미리 연습을 하고 가면 그런 일은 방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치학 이론 시험에서 사례를 기계장치와 비교하여 서술하였다고 점수를 깎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성공적이었다. 운 좋게 글쓰기는 거의 다 A학점을 받았다.
한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긴 문장이 멋지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단문의 매력에 빠졌다. 호흡이 짧고 메시지가 명확하고 간명하여 좋다. 연설문도 단문이 힘이 있고, 청중들에게 쉽게 들린다.
그 후로는 보도자료, 기획서, 보고문서, 분석서 등을 주로 썼고, 장관 스피치라이터를 하면서 연설문, 서한문, 감사장 문안, 환영 및 축배사 등등 실용적인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다. 법정 스님의 글쓰기는 쉬운 언어로 깊은 뜻을 담아내어 닮고 싶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소년 같아서 좋았다. 나태주 시인의 순수한 언어, 행복한 언어도 흉내 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래서 자주 읽게 된다. 시인 백석의 스타일은 좋지만 내게는 어렵기만 하다.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내용과 문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소설가 박범신의 글은 등장인물의 감정과 장면의 묘사가 직접 겪는 것보다 더 실감이 난다. 역사소설가 손정미 작가의 글은 시공을 넘나들면서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서강대 김동률 교수의 글은 지식과 감성이 조화로운 명문이다. 서원대 김병희 교수의 글은 탁월한 관점과 식견이 돋보인다. 그 밖에도 일일이 열거하지 않은 문장가들이 참 많다. 모두 스승이다.
나의 글쓰기의 종합체는 2016년에 낸 회고록을 겸한 에세이집일 것이다. 첫 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편안하고 쉽게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다시 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만회의 기회를 궁리 중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세 가지 기둥을 지향한다. 시간, 공간, 사람이다. 나는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이 세 가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에서 시간, 공간, 사람은 시공에 따라 각각의 위치를 달리하며 인물, 사건,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또 하나는 앞으로의 도전과제다. 입체적인 글쓰기, 바로 그것이다. 평평하고 일직선인 글이 아니라 3차원적인 형태의 글... 소설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같은... 어떻게 쓸지는 아직 모르겠다. 암중모색 중이다. 무엇보다 일상의 언어로 쉽지만 의미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게 목표다.
글쓰기는 왕도가 없다고 본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쓰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말한다. “쓰기야 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최후의 권능이다.” 이 말에 힘을 얻어 나의 글쓰기 실험은 실패를 무릅쓰고 계속될 것이다.
생각이 멈추는 순간까지 가야 할 나의 글 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