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여행기
얼마 전 고등학교 입학 50주년을 다녀왔다. 졸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문집을 하나 냈는데 거기에 내 글이 실려 있었다. 까마득히 잊어버린 글을 읽으면서 18살 시절로 되돌아갔다. 어법이나 표현이 여물지 않았지만 원문 그대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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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6일
이00
(1977년 금오공고 3학년)
지난여름방학 동안의 훈련에 지친 아이들은 외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쁘기 한량없는 모양이었다. 대운동장 파란 잔디(잡초가 생각난다) 위에서 다른 아이들은 이번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속해 있는 일부 아이들은 실습장에서, 혹은 교실에서 그들대로 해야 할 일을 며칠간 계속했다. 외박 전까지 내가 해야 할 며칠간의 일은 (전국기능대회가 올해는 우리 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이것 때문에 행사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박이 실시된 것이다.) 실습장에서 대회준비의 마지막 단계를 완료하거나 정리정돈을 하는 것이었고, 기숙사에서 돌아와서는 이번 외박을 멋지게 보내기 위해 ‘방랑 6일’의 여정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같이 여행할 아이를 찾는 것이었으며 이내 적절한 아이를 찾을 수 있게 되어서 이 ‘방랑 6일’의 첫 준비에 아무런 차질을 가져오게 하지 않았으니 무척 즐거운 여행이 되고 멋진 여행이 되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어서 무척 다행스럽고 행운 적이었다. 바로 그 아이가 J 군이었던 것이다.
J군은 집 밖에 갈 데가 없다고 투덜거리다가 나의 제의에 홀딱 반해 버린 것이었고, 나도 또한 그와 더불어 이 위험천만한 (이렇게 말하면 과장되고 비약된 것이지만) ‘방랑 6일’을 계획하기로 한 것이다. 그 뒤 J군과 나는 차근차근히 ‘방랑 6일’의 최소의 예산과 구체적인 여정을 계획했으며, 숙박문제에서부터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최대의 쾌락과 고통을 부여한 식사문제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준비해 나갔다.
무엇보다 급선무가 사복을 구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같이 착실한 놈이 훈육감 선생님께서 그토록 말리시는 사복을 소지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복을 가진 아이들은 모두 착실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 사복을 빌렸었기 때문에...... 싸구려 청바지와 때에 잘 맞는 한 여름용 반소매 T셔츠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 좋은 것을 소지한 나만한 아이가 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컸었다면 이것저것 고를 수 있을 만큼의 풍족함을 누릴 수는 있었을 게다) 썩 만족할만한 것은 못되었다. J군은 제법 재수생 티가 날만한 갈색 바지와 야한 남방을 빌렸고, 요즈음 유행하는 끝이 뾰족한 구두까지도. 그런대로 사복문제는 해결됐고, 닥쳐올 6일간의 최대의 쾌락과 고통만이 남게 됐다.
우리가 계획한 ‘방랑 6일’의 여정은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남도의 일부였다. 강원도에서의 숙박문제는 내가 옛 고향 친구들이 도시로 나와 공부하는 하숙집으로 안면 몰수한 채 찾아가겠다는 다짐과 경기도, 충청남도에서는 J군이 자신의 친척집과 고향집에 들러 해결하겠다는 약속으로 일단락되기 했지만 몇 가지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문제는 ‘방랑 6일’의 예산에 어느 정도 포함되었긴 했으나 6일이라는 기간에 비해 턱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었으며, 생각하다 못해 생각한 것이 학교에서 매일 저녁 공부하는데 수고하고 애쓴다고 지급되는 간식인 빵을 30개 정도를 쾌락과 고통스러움을 덜어 주는데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루에 한 개씩 나오는 빵을 하루 만에 어떻게 30개씩이나 구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빵 굽는 아저씨에게 사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남는 빵은 하나도 없었고, 빵 재료조차 바닥이 날 판이라고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반 애들의 빵을 하루정도 슬쩍하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최후의 방법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정직한 독자 여러분일지라도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 빵은 내일 나오게 된다. 식당 사정으로 말이야!”하고 거짓말을 진지하게 지껄인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여행 가방에 J군이 주번보다 먼저 가서 타온 빵을 담고 우리만이 알 수 있는 어디 깊숙한 곳에 둔다. 계획은 제대로 잘 되어갔다. 내일 저녁 빵 나올 때쯤이면 아이들은 우리의 얄팍한 속임수에 분노를 터뜨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방법이 유치하다.”라는 등 욕지거리를 터뜨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둔 그때의 심정은 그저 담담했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식사문제는 모두 해결이 된 셈이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어울리지 않는 사복을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입고 도둑고양이처럼 학교를 나섰다. 늦여름의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렸고, 물기 없는 둑길은 한 발자국을 떼어놓을 때마다 먼지가 푹석거렸다. 그러나 J군과 나는 즐겁고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흡사 재수생인 J군이 쓴 도수 없는 안경을 번갈아 써 가면서 ‘방랑 6일’의 첫 도약을 했던 것이다.
역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기차시간을 확인하고 철도청에서 발행하는 ‘전국교통안내서’를 200원이라는 충격적인 금액을(이 여행 예산과 비교해서) 주고 산 뒤 빵집으로 들어가 ‘전국교통안내서’를 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다음 다시 기차시간이 되어 역으로 나오자 1학년이 사복을 입은 나에게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날카롭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심문하듯 묻는 것이었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놈처럼 심장이 뜨끔했다. “응... 집에...”하고 나는 얼버무렸지만 무척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기차가 20분 연착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영주행 보급 열차를 탔다. 기차는 드디어 벨을 울리더니 덜커덩거리며 출발했다. 웬 여학생 둘이 아까 역에서부터 우리를 미행하였는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탄 객차에 까지 올라 바로 우리 곁에 서있는 것이었다. 어찌 이 몸의 심장은 잘 잘 때처럼 규칙적인 고음을 그대로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발갛게 놀이 물든 서쪽의 저녁하늘과 넓은 들판의 풍성한 아름다운 광경이 과연 그렇게 보였겠는가?
그러나 나는 내가 여태까지 갈고닦아 온 쥐꼬리만 한 이성의 혜택으로 심적 안정을 되찾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미행자들의 얼굴을 (그들의 엄마 아빠가 만들어 놓은 예술품의 최고 중요 부분) 세심히 훔쳐보았다. 하이타이로 빨았는지 새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적어도 내 눈에는 무척 새침하고 예쁘장하게 비쳤으며, 사복을 걸친 여학생은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 주인공 스카알렛과는 꽤나 거리가 먼 듯하게 보였다. 만약 내가 저 미행자들에게 오늘은 별을 꽤 많이 볼 수 있다든지, 서쪽 황혼이 무척 아름답다든지, 바람이 꽤 시원하고 서 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다든지, 어디 가느냐고 말을 건넨다면 대답 정도는 하겠지. 몇 가지 재미난 얘기를 해주고 나 혼자 “낄낄낄낄” 승객들이 쳐다볼 정도로 웃는다면 민망해서라도 쓴 미소 정도는 지을 게고. 내 자랑을 한참 늘어놓으면 동정의 표시로 고개라도 끄떡거리고 몇 마디 의미 없는 칭찬이라고 할 것이다. 실례지만 어디에 있으며 이름이 무어냐고 슬그머니 묻는다면 내 뺨에 불이 켜지지 않는 한 대답은 분명히 내 귀에 기차소리와 뒤범벅이 되어 희미하거나 또렷하게 들려올 게고 그렇게 되면 나는 더욱 신이 나서 한참 지껄이다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가고 있다. 그곳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마지못한 표정으로 (이쯤 되면 사실 이런 표정은 본심과는 전혀 다른 것을 독자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이 지리시간에 배워 알거나, 혹은 경험에 의해서나 여기저기에 들어 아는 지식을 겨울을 지난 도시 아주머니가 옥상에서 두터운 겨울 솜이불을 털 듯이 모두 내게 털어놓을게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뒤죽박죽 하다 보면 최소한 그 미행자들의, 아니 여학생들의 주소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소를 알게 되면 IQ 세 자릿수밖에 안 되는 이 몸은 스카알렛과 거리가 먼 여학생의 주소는 곧 까마득히 잊게 될 것이다.
이런 공상에 젖어있던 나의 타원형 동공에 미행자들은 비치지 않았다. 짧은 목을 길게 빼고 상하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전자동 카메라가 그들의 모습을 잡았으나 내 얼굴은 이내 붉어졌다. 그 미행자들이 동행인 듯한 남학생들과 뭔가 재미난 듯이 시시덕거리는 (나는 하나도 재미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꼴을 봤을 때의 가느다란 분노와 허탈감, 공허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얼굴만 붉히고 있는 소극적 인간이라고 나를 평가하려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나는 “불가능은 소심자의 환상이며 비겁자의 도피처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내가 만약 나그네의 입장에서 주인과 싸운다면 이길 것은 뻔하고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는 분명히 있었지만 나그네로서 주인 대신 얼마간의 고통을 당하는 편이 훨씬 사내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몇 백 원의 가치 있는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마음만은 기차를 재촉했다.
이런 비극을 연출한 기차는 아까보다 더욱더 슬금슬금 기어갔다. 어둠 속을 기어가는 기차는 덜커덩 거리는 소음으로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고 허공을 가르면서 은하수 뿌려진 밤하늘 뭇별들의 속삭임을 질투하는 것 같았다. 기차가 영주역에 도착했다. 내릴 사람은 다 내리고 탈 사람을 다 태운 기차는 덜커덩거리는 소음을 뒤로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음료수 두 병을 샀다. ‘방랑 6일’ 예산에 다소 차질이 생긴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맹물과 빵을 먹을 수 없다는 막연한 의식에서 우리는 음료수 두 병을 산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옆자리 친구인 S군이 조그마한 까만 가방을 둘러메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것을 희미한 역전 가로등 덕택에 확인하고는 나도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보였다. 우리 곁으로 다가온 S군은 권하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어디에 가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아참, S군에게는 우리의 여정을 도청할 기회가 있었지!) 찾고 있었다고 했다. 영주역을 들려야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을 일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가 와 와서 축축한 포장 집 의자에 앉아 기차시간까지 불과 20여 분 얘기를 나눴지만 무척 길게 느껴진 것은 한낱 기다림의 초조감에 불과했던 것 같다. S군과 ‘Good bye’를 서로 외치고 플랫폼으로 나온 뒤 바로 S군이 숨이 목구멍에 걸릴 듯이 뛰어왔다. “왜?”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 나에게 [전국교통안내서]를 건네주고는 “잊고 갈 뻔했잖아!”하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와 안도의 한숨이 뒤범벅이 되어 웃어 보일 뿐이었다. S군이 냄새나고 주정뱅이들이 누워 코를 고는 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방금 도착한 제천행 완행열차를 탔다.
비교적 한산한 열차였으므로 영주역을 출발해 두 번째인지 세 번째 역을 지나서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나는 어느 차를 막론하고 타기만 하면 이상스레 잠이 오는 습관이 있다. 심지어는 버스 안에서도 자는 나는 항상 남보다 몇 m씩 더 걸어야 만 한다. 제천역에는 하숙집 아주머니들이 무척 극성스럽게 새벽잠을 설 깬 눈으로 손님을 찾는 외침으로 시끌시끌했다. 기차시간이 되려면 3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밤새 피로가 몰려와 의자에 앉은 채 J군과 나는 1시간 30분씩 교대로 잤다. 내가 초번 불침번이었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몇 명의 손님들이 역을 통해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역은 새벽열차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복잡했지만 모두들 말이 없었다. 잠을 못자서인지 모두들 수척한 눈을 비비며 길게 하품을 하며 의자에 옆으로 길게 누운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에 짜증이 나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영월행 완행열차는 텅텅 비어있었다. 새벽차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새 말라비틀어진 빵을 씹으면서 차창으로 어둠이 깔린 새벽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달은 저만큼 움직였고, 뭇별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새벽공기가 열린 차창을 통해 완행열차 특유의 냄새를 휘몰아갔고, 어둠 속을 가르면 질주하는 새벽열차는 이따금 기적을 울리며 천천히 달렸다. 우리는 의자에 길게 누워 잠들었다. 잠결에 J군이 “한 역만 지나면 영월이다.”하고 소리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의식은 다시 가물가물 사라졌다. 한참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지나서 J군이 나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바로 조금 전에 영월역을 출발했단다. “제기랄 잘 돼가는군” 우리가 기차에 엉거주춤 서있자 웬 아주머니(아마 장사하시는 분들인 것 같았다)가 “학생들, 내려야 할 역을 지났나 보고만. 이 차는 예미역까지 가서 약 2시간 정차해 있다가 다시 돌아간다오. 제천방향으로 말이야”하고 알려줬다. 우리는 일단 예미역까지 가기로 했다. 예미에 도착 후 나와 J군은 차에 그냥 남아 2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누운 채 의자 옆으로 나온 발을 살그머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만약에 우리가 종점인 예미역에 내리지 않고 이 차가 다시 영월 쪽으로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따금 들리는 구두 발소리에 가슴은 두 방망이질했고 죄여 드는 것 같았다. 팔자 좋게 정신 못 차리고 자는 J군이 얄밉게 느껴졌다. 다시 또 잠든 나는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손님들이 막 기차를 타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휴우” 안도의 심호흡을 하고는 끈적끈적한 손등과 팔등을 문지르며 J군을 깨웠다. 기차 통학생이 무척 많았다. Y공고 1학년 학생을 붙들고 **과 3학년 0군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잘 모른단다.
비록 맑게 갠 날씨는 아니었지만 상쾌한 아침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영월역을 빠져나온 우리는 흰 무리들을 따라 걸었다. 영월읍내는 별로 정리된 거리는 아니었고 건물은 모두 낡아 보였다. 한참 흰 무리를 따라 걷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남학생들은 내려오는 사람만 보이고 같은 방향으로 걷는 흰 무리들은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이크! 뭔가 또 잘못됐군.”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Y공고는 남학생들만 다니는 곳이니 말이다. 한 여학생을 붙들어 세우고는 Y공고가 어디냐고 물어봤다. 애써 걸어온 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뒤돌아가서 왼쪽으로 보면 남학생들이 많이 가는 길이 있어요. 그 길로 올라가면 Y공고가 보일 거예요.” 감사를 연발하면서 우리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 Y공고 정문 앞으로 갔다.
키에 비해 몸무게가 가벼울 것 같은 Y공고 3학년 생에게 “나는 0군의 친구다. 0군을 만나려 하니까 0군이 등교했으면 불러 달라.”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 후 아까 그 학생이 0군은 아직 등교를 하지 않았다고 알리고는 나의 감사를 듣는 둥 마는 둥 급히 다시 돌아갔다. “무슨 바쁜 일이 있나 봐”하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Y공고 정문 앞에서 서서 나는 등교하는 1500명의 학생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J군은 0군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그 일에서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풀잎의 아침이슬은 점점 증발되어 갔다. 정문 앞에 서있는 느티나무 껍질을 뜯으면서 살피고 서있었다. 그러다가 무심히 큰길로(우리가 걸어온 길) 고개를 돌리자 모자를 벗어 든 채 걸어오던 0군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그저 무지무지하게 반가울 뿐이지만 0군은 예기치 않은 만남에 무척 놀랍고, 반갑고, 궁금하고 야릇한 생각이 뒤범벅이 된 눈치였다. 0군의 손을 덥석 잡고는 궁금증을 풀어주고 J군을 소개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길바닥에서 두런두런하다가 오후 2시에 버스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0군은 수업을 받기 위해 정문을 들어섰고 우리는 발걸음을 버스 주차장으로 옮겼다.
0군은 기능검정시험을 대비해서 하루 4시간씩 수업을 하고 있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고씨동굴 행 버스 시간표를 보고 시간을 계산해 보고는 아까 영월역에서 걸어올 때부터 봐두었던 강가로 가서 세수와 양치질을(그때 칫솔은 한 개였으며 공용이었다) 하려고 막 출발하려는데 0군이 사복을 갈아입고 뛰어왔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웬일이야?” 학교수업은 어쩌고? “하고 묻자 0군은 ”별일 아니야! 옆 아이에게 대신 대답해 달라고 그랬어! “라고 대답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만큼 뼛속 깊이 파고드는 우정을 느꼈다. 만일 그렇게 달려온 0군에게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공부해! 빨리 가!”하고 그의 등을 가볍게 밀기라도 했다면 0군은 얼마나 섭섭했겠으며 그렇게 뛰어온 우정을 몰라보는 나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터벅터벅 이미 시작된 수업에 학교로 돌아가서는 과연 1시간을 소비하고 나머지 3시간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0군의 땡땡이를 즐겁게 큰 우정의 표시로 이해해 주었던 것이다.
0군의 하숙집에 가 우리는 제일 먼저 세수를 하고는 지난여름방학 때의 밀렸던 얘기까지 나와 나누는 동안 J군은 가끔 묻는 말에 대답할 뿐 뒷전에 앉아 신문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뒤 우리 셋은 버스를 타고 고씨동굴로 향했다. “강원도 사람은 무얼 먹고살지? 논이 하나도 안 뵈는데 말이야!”하고 J군이 세 번째 그렇게 말했을 때는 무척 짜증이 났다. “사람인데 밥 먹고 살지 인마! 뭐 별다른 줄 알아!”하고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버스에서 내리자 금방 폭우라도 쏟아질 듯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씨동굴을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통에 사공은 배를 띄우려 하지 않고 속주머니에서 축축하게 습기에 찬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상점의 포장 밑에 앉은 우리들은 머리만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비가 조금 그쳤다. 사공이 피우던 담배를 비가 여전히 조금씩 내리는 땅바닥에 던지자 담배는 “쉬시 식”하는 소리를 내고는 이내 누런 창자를 드러냈다.
이 나룻배는 그 강에 쇠밧줄로 강을 가로지르고는 그것을 잡아당겨서 사람들을 나르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건너편에 닿자마자 뛰어내린 나는 계단을 3개씩 한꺼번에 뛰어올라갔다. 비를 덜 맞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고씨동굴 입장료는 내가 내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월에서 거기까지 버스요금이며 버스 안에서 먹은 사과며 과자는 모두 0군의 호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모인 10여 명의 일행은 사진사 아저씨의 안내로 동굴을 구경했다. 동굴을 들어서자 무척 추웠다. 기온의 차로 바깥공기와 동굴 안의 공기가 서로 엉켜있는 입구는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었고, 동굴 안은 온통 전등이 켜져서 길을 밝혀주고 있었으며 기묘하게 생긴 종유석들은 신이 만든 최대의 걸작품인 듯했다. 임진왜란 때 고씨들이 거처하였던 곳이라서 ‘고씨동굴’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동굴은 길이 약 6.6 Km로 동굴 깊숙한 곳에 박쥐가 서식할 뿐 생물이라곤 전혀 살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본 그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할 줄만 안다면 나는 셰익스피어를 능가할 만한 대문호가 되었을 것이다.
고씨동굴을 구경하고 나온 우리 셋은 비를 맞으며 ‘방랑 6일’의 남은 여정을 위해 아까 그 나룻배에서 내려 뛰어 올라온 계단을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갔다. (197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