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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보리밭

전쟁과 빈곤, 사무친 그리움

by 생각전사

가곡 ‘보리밭’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푸름이 짙어가면서 보리가 익어가고 있다. 농부들은 여름채비에 쉴 짬이 없다. 보리는 쌀 다음 가는 곡물로 우리들에겐 친숙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지만 어려웠던 시절 사오월 고비를 ‘보릿고개’라 부를 만큼 보리는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양식이기도 했다. 대중가수 진성이 부른 ‘보릿고개’란 노래까지 있다.


이맘때 자주 듣는 보리 관련 노래가 있다. 가곡 ‘보리밭’이다. 윤용하(1922년 3월 16일~1965년 7월 23일)가 작곡하고 시인 겸 아동문학가 박화목(1924년 2월 15일~2005년 7월 9일)이 노랫말을 지었다.
이 노래는 서정성 짙은 노랫말에다 멜로디가 부드럽다. 소박한 시가 지닌 서정성과 선율이 지닌 종교성이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다. 4분의 4박자, 내림라장조, 보통빠르기로 나간다. 4마디의 전주와 36마디의 본 곡으로 된 자연스러운 틀을 갖췄다.

작곡가가 작사가에게 “노래 만들자” 제안


‘보리밭’은 6·25전쟁 때 부산서 만들어졌다. 작사자 박화목은 종군기자로, 작곡가 윤용하는 해군 음악대원(종군작곡가)으로 활동했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 간 두 사람은 친구사이였다. 둘은 어느 날 자갈치시장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얘기를 나누게 됐다. 윤 작곡가가 국민의 마음을 달래줄 서정가곡 한 편을 만들자고 제안하자 박 시인이 받아들였다.


같은 이북출신으로 동질감을 느낀 두 사람은 후세에 남길 가곡 만들기에 뜻을 모은 것이다. 둘은 노래작업에 들어갔다. 박 시인이 가사를 썼고 윤 작곡가가 곡을 붙여 ‘보리밭’은 태어났다.


이 노래는 작사가가 노랫말을 지어 작곡가에게 멜로디를 붙여달라고 제안하는 일반가요 와 달리 작곡가가 먼저 작사가에게 노래를 만들자고 한 게 특이하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윤 작곡가는 평소 헛소리를 자주 들었다. 귀엔 허청(虛廳)이 끊이질 않았다.


허청기가 있는 그는 어느 봄날 보리밭을 걷고 있었다. 뒤에서 뭐가 들려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길 여러 번. 그는 결국 보리밭에서 어떤 사람이나 물체도 없는 헛소리만 듣고 말았다.


허청에 대한 그의 형상 찾기는 예술혼으로 이어져 멈추지 않았다. 소리가 난 곳에 아무 것도 없을 리 없다고 마음먹고 찾길 계속했다. 끝까지 파고들다 보면 미(美)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곡(曲) 만들기를 거듭했다.


마음속 형상으로 듣게 된 보리밭에서의 허청이 드디어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음표로 살려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의 집요한 예술관에서 나온 악상의 결실이 가곡 ‘보리밭’이다.


노랫말 속 보리밭은 박화목 시인 고향마을


노랫말에도 에피소드가 있다. 6·25전쟁 때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부산으로 간 박 작가는 1952년 피란지에서 시를 썼다. 제목은 ‘옛 생각’. 그러나 윤용하가 사흘 만에 작곡한 오선지엔 ‘보리밭’으로 바꿔달았다.


어릴 때 봤던 고향의 보리밭을 떠올린 것이다. 박화목은 황해도 긴내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평양에서 자랐다. 노랫말 속의 보리밭은 그가 살았던 고향마을 보리밭이다. 그는 늘 어머니 손을 잡고 밖에 나갔다가 집 가까이로 오면 산등성이 길을 넘어 눈앞에 펼쳐지는 보리밭을 봤다.


그리고 보리밭 하늘 높이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도 들었다. 그는 잊혀가는 향토정서를 되찾고 한민족의 애수를 그리움으로 승화시켜보자는 뜻에서 그렇게 작시(作詩) 했다.


통절(通節)로 된 노랫말에 나오는 '뉘 부르는 소리'의 여운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악보 맨 위에 ‘뜻을 생각하며’라고 적혀있어 박 시인의 작시배경을 떠올려보면 노래 맛이 더욱 깊어진다. 가사 속의 보리밭은 그리움이다. 아스라이 잊혀져가는 일들이 그리워지는 애틋함을 노래했다.


박화목 선생은 황해도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 만주 봉천동북신학교,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941년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동시(피라미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는 기독교신앙에 바탕을 둔 동심의 세계를 선보이며 동화·동시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과수원길’, ‘망향’ 등의 노래는 유명하다.


가곡 ‘보리밭’은 처음엔 대중들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서울서 열린 초연(初演) 때도 반응은 별로였다. 생존이 우선이었던 때라 잘 알려지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인기를 모았다.


1974년 대중에게 본격 알려지고 고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렸다. 부르기가 어렵지 않고 노랫말과 가락이 서민적이어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독창은 물론 합창곡으로도 편곡, 애창됐다. 경희대 음대 교수 엄정행 테너, 국제적인 성악가 조수미 소프라노 등이 음반을 내어 노래를 알린 것도 한몫했다.


요즘도 방송과 각종 무대에서 ‘보리밭’을 들을 수 있다. ‘보리밭’ 가곡 태동지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에 가면 노래비가 있다. 부산시 중구청이 2009년 5월 25일 세운 것이다.


작곡가 윤용하, 2005년 문화훈장 추서


작곡가 윤용하 선생도 일화가 많다. 그는 1959년 사라호태풍 때 의연금품을 받는 신문사로 찾아가 입고 있던 겉저고리를 벗어놓고 나올 정도로 마음이 따뜻했던 음악인이다. 43살에 세상을 떠난 그는 어렵게 살았음에도 작곡엔 열심이었다.


집과 악기를 가져보지 못 한 채 정리되지 않은 오선지뭉치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얘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만인 1972년 그의 벗들과 세광출판사 배려로 윤용하 작곡집 '보리밭'이 나왔다. 정부는 2005년 윤 선생 타계 40주기를 맞아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뜻있는 분들이 참여한 윤용하기념사업회(회장 오현명, 부회장 이부영)도 만들어졌다.


그는 황해도 은율에서 옹기장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다 만주 신징(新京) 음악학교에서 기초과정을 닦고 동 음악원을 수료, 신징과 펑톈(奉天)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펑톈에서 조선합창단을 만들어 여러 번 발표회를 가졌다.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 정인보 선생이 가사를 쓴 ‘광복절 노래’를 작곡했다. 6·25전쟁 땐 종군작곡가로 ‘사병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참고자료는 조선일보(2005년 10월 24일자 이규태 코너 ‘보리밭’ 음악회 기사, 책 ‘노래여, 민족이여’, '한국의 동요', 박화목 저서 ‘보리밭 사잇길로’ 등이다.


왕성상 언론인/가수(여성소비자신문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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