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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따르다

시간과 태양, 인공, 그리고 봄

by 생각전사

현관 앞에 세워둔 자전거에 겨우내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가며 “언제 저놈 손을 좀 봐야 하는데...” 하고 생각만 하다가, 엊그제 볕이 좋아 마침내 날을 잡았다.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가 아파트 단지 벤치 하나에 기대어 놓고는, 헝겊에 기름을 묻혀 묵은 때를 벗겨냈다. 자전거를 거꾸로 세우고 체인과 구동 장치를 하나하나 닦고 기름칠까지 꼼꼼히 했다. 내 무관심과 게으름 탓에 흐물흐물해진 타이어에도 알맞게 바람을 넣어주었다. 금세 자전거는 지난해 가을처럼 말끔해졌다.


이쯤 되면, 이놈이나 나나 달리고 싶어진다. 우훗, 봄바람이 상쾌하다. 한동안 이놈과 교감이 없었던 내 허벅지 탓인지, 이놈도 아직 예열이 덜 된 탓인지, 달리는 폼이 지난해보다 못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속도에 대한 집착은 나나 이놈이나 못된 승부욕임이 곧 드러났다. 그러자 봄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왔다. 그 사이로 나뭇가지는 봄을 잔뜩 머금은 채 살랑살랑 바람을 탔다. 부지런한 농부가 어느새 밭을 갈아놓은 걸 보니 곧 씨를 뿌릴 모양이다.


작은 강변에선 사방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도와 자전거 도로를 새로 놓고 있었다. 공원화 작업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강 주위로 자라 있던 작은 나무와 갈대, 풀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시야가 확 트여서 좋다며 달리던 중 겨울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제법 크고 미끈한 꽃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콘크리트 도로를 기어가다가 자전거에 놀라 주춤거린다. 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저들의 서식지가 사라졌구나. 인간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손길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되고 있구나.” 풀이 자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올봄부터 가을까지 이 도로를 달릴 때 뱀과의 조우가 더 잦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식지를 잃은 저들이 점차 사라질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오산까지만 달릴 생각이었지만, 허벅지도 겨울잠에서 깬 듯하여 평택까지 냅다 달렸다. 역시 숨이 찰 정도가 돼야 좋다. 폐 속의 묵은 찌꺼기가 다 빠져나갈 것 같아서다. 늘 그러하듯 나의 반환점, 그 자리를 돌아서 잠시 속도를 낮추고 유유자적하니 등이 따뜻하다. 뉘엿뉘엿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뒤에 선 것이다. 달려온 시간과 뒤에 선 태양을 잠시 생각하며 달리는데 누가 앞장서 간다. 그림자, 바로 나의 그림자였다.


조금 전까지는 내 뒤를 따르던, 아니, 볼 수도 없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나의 그림자가 앞장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자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서 갔다. 그가 빨리 가면 나도 빨리 가고, 그가 천천히 가면 나도 천천히 갔다. 그렇게 한참을 그림자를 따라 달렸다. 해가 점점 서쪽 하늘로 넘어가자 그림자도 점점 사라져 갔다. 그때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번엔 인공이 만들어낸 그림자였다. 인공의 그림자는 때론 앞에, 때론 뒤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시간을 떠올려본다. 그때는 태양이 앞에 있었다. 나는 그 빛을 쫓아 달렸다. 그림자가 따라오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새 태양은 뒤에 서 있다. 이제는 내 그림자를 따라가야 할 시간이다. 그러다 인공의 그림자를 따르게 되고, 결국 그 그림자조차 사라지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래도 봄은 여전히 찬란하다. 겨울의 그림자가 봄은 아니듯 올봄은 지난해의 봄이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 새로이 피어나는 봄이 분명하다. 나는 올봄에도 태양이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나의 그림자를 따르며, 그 그림자를 발자국처럼 뒤로 남기는 시간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찬란한 봄꽃의 향기를 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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