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평평한 저 땅 위에
저기, 평평한 땅 위에 본래 산이 하나 있었어. 돌산이었지. 하지만 멀리서 보면 돌산 같아 보이진 않았어. 바위 틈새를 뚫고 자라난 나무들과 척박한 흙에서도 끈질기게 뿌리내린 풀들이 제법 우거져 있었거든. 그냥 산, 아니 작은 동산이었어. 산을 본 사람들은 꽤 많았을 거야. 그 옆 고속도로로 차가 많이 더녔거든. 지금은 지하로 들어갔지만. 하긴, 누가 그런 걸 기억이나 하겠어? 흔하디 흔한 동산이었는데…
산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니 동네 사람들이 무시로 올랐을 거야.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았거든. 봄이면 나물을 뜯고, 겨울이면 땔나무를 베었겠지. 한겨울 눈이 흠뻑 쌓이면 동네 장정들이 토끼나 꿩을 잡으려고 몰이를 하거나 몰래 덫을 놓았을지도 몰라. 개구쟁이들이 전쟁놀이를 했을 수도 있고… 그냥 내 짐작이야. 난 거길 잘 몰라. 토박이가 아니거든.
신도시가 여기에 들어서는 바람에 이곳에 살게 됐어. 대출을 잔뜩 끼고 겨우 산 집이지. 터파기 공사할 때부터 자주 찾아오곤 했는데, 건물이 올라가는 게 좋더라. 공사가 빨리 끝나길 바랐고. 그때 이곳 주위는 온통 논과 밭이었어. 떠나지 못한 노인들이 사는 오래된 농가와 개발에 밀려 비어버린 집들이 적잖이 남아 있었지. 그땐 그 동산이 있다는 걸 몰랐어. 여기에 정착하고서야 알게 됐지.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말이야.
동산의 존재를 안 건, 오랜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어. 자전거 타기에 막 재미가 붙던 시절이었는데, 반쯤 잘려 나간 산이 내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지. 도로가 생기면서 산의 몸통 절반이 잘려 나간 모습이었어. 이상하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오히려 흉물스럽다고 느꼈지. 반 토막 난 산은 자전거를 타고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내 눈길을 끌었어. 저 반쪽도 언젠가는 없어지겠구나 싶었지. 마침 고속도로를 지하 화하고, 그 위에 상가와 호텔, 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된 직후였거든.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산은 결국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었지.
고속도로를 지하로 넣고, 양쪽으로 갈라진 도시를 하나로 잇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착착 진행되더군. 물론 몇 년 지연되긴 했어. 그럴수록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멋진 도시가 들어서길 바랐지. 매일 공사 현장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는 사람까지 생겼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영상을 올렸어. 지금도 그래. 참 부지런한 사람이야. 그의 영상을 꼬박꼬박 챙겨 본 덕분에 산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지. 공사 인부들은 산을 허물기 전에 쓸 만한 나무들을 이식했고, 산꼭대기부터 불도저로 밀어버리기 시작했어. 산의 겉을 덮고 있던 건 황토, 금빛에 가까운 흙이었어. 얼마나 곱던지. 하지만 불도저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나는 모습이 안타까웠어. 흙더미가 금세 여기저기 쌓였고, 덤프트럭이 그걸 실어 나르곤 했지. 산의 살점이 지구 어딘가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울퉁불퉁한 곳이 평평한 땅으로 변하는 상상 말이야.
그저 온전히 몸을 그렇게 내주고 이내 사라지려나 싶던 산이 어느 날 뜻밖의 저항을 보였어. 사실 그 산은 돌산이었거든. 황토가 걷히고 나자 산의 아래쪽 깊숙이 커다란 암석층이 드러났지. 불도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단단한 암석. 흥미진진하더라고. 산의 저항은 꽤 완강해 보였어. 며칠간 조용하더니, 사람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나타났어. 돌 파편이 날아가는 걸 막으려고 굵은 쇠줄로 엮은 두꺼운 철망을 암석 위에 덮고는, 그 밑에 구멍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더라고.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어. 결국 폭음과 함께 암석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지. 바위 조각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졌어. 산의 뼈가 살점처럼 지구의 어느 빈터를 또 메운 거지. 그렇게 산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어. 지금 그 자리는 평평한 땅이 되어 있지. 산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누가 알까?
하지만 난 알아. 저기, 평평한 땅 위에 산이 있었어. 작은 산이. 아직도 눈에 선해. 형체를 잃은 산은 언젠가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지겠지. 하지만 분명한 게 하나 있어. 그 산의 살과 뼈가 예전에 비어 있던 지구의 어느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건 결코 잊히지 않는 일이지. 이 사실이 사라진 산과 그 산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