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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속에 숨겨진 힘

연결자의 소명

by 생각전사

몇 해 전 어느 날, 아들과 손녀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러 갔다. 맑은 오후, 바람은 유난히 부드러웠고 웃음소리는 길게 퍼졌다. 나는 우연히 둘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중, 그들 사이로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끈이 어느새 내게까지 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대를 가로질러 이어진 생명의 줄기, 그 미묘하고도 깊은 연결이 내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DNA, 디옥시리보핵산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며, 과학은 이를 ‘생명의 설계도’라고 부른다. 우리 몸속의 수많은 세포에는 고유한 유전 정보가 저장되어 있고, 이 정보는 우리를 만들고 유지하며,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단 네 가지 염기(A, T, C, G)의 조합만으로 외모, 성격, 건강 상태까지 형성된다는 사실은 실로 경이롭다. 하지만 이 유전 정보는 단순히 정해진 운명을 기계적으로 전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다. 환경과 삶의 경험에 따라 그 발현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DNA의 의미는 훨씬 더 깊고 유연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주목받는다. 우리의 식습관, 감정 상태, 인간관계, 심지어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도 DNA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삶의 고정된 지침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반응하는 살아 있는 설계도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손녀의 손을 잡고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지금 내 앞에서 천진하게 웃고 있는 이 작은 존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이처럼 DNA는 단지 생물학적 코드 그 이상이다. 그것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이며, 생명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축적된 가능성의 그릇이다. 인간은 진화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으며, 단순한 유전 정보를 넘어 공동체, 언어, 문화, 가치 같은 비유전적 자산도 함께 물려주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지적, 경험적, 사회적, 그리고 국가적 자산을 쌓아간다. 그것은 생물학적 DNA 이상의, 인간만이 만들어낸 특별한 유산이다. 바로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해 온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지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함께 물려줄 책임이 있다. 나는 이것을 현직을 벗어난 이들의 **‘연결자 사명’**이라 부르고 싶다. 한때 나는 삶의 무대에서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내 생애의 마지막 소명은 사회적 DNA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 가치와 정신을 다음 세대와 연결하는 이 역할이야말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미래의 책임이다.


그날 사진 속 아들과 손녀의 뒷모습은 조용히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도 그 끈의 일부였습니다.” 그 순간, 단 한 장의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한 살 무렵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어느새 손녀의 눈빛 속에도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DNA의 힘이다.


DNA는 단순한 분자를 넘어선, 창조의 신비이자 인간됨의 본질을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유전 이상의, 시간과 생명을 연결하는 깊은 책임 또한 숨겨져 있다. 생물학적 DNA에 이어지는 사회적 DNA, 이것이야말로 우리 안에 깃든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강인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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