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낙인
“배신은 결국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된다.”
-에리히 프롬-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뺏어 버리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가는가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노래 〈배신자〉 가사다. 이 노래는 1969년 가수 도성이 불렀다. 이 노래 작곡가 김광빈의 외종질 가수 배호가 다시 불러 유명해졌고, 2020년 가수 임영웅이 불러 유명세가 더해졌다. 사랑에 배신당한 홀로 남은 이의 절규다. 떠난 님의 뒷모습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배신의 상징으로 소환된다. 역사의 무대에서도 수많은 뒷모습이 진심과 은혜를 짓밟고 떠났다. 그들은 배신의 아이콘으로 기록되고 회자된다.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 배신자는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다. 그는 한때 개화파 관료로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합에서 중심 역할을 하며 대한제국 패망에 앞장섰다. 일본의 협박과 열강 외교의 냉혹한 현실을 일신의 안위와 영달로 바꾼 매국노의 길을 갔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이완용의 뒷모습은 오늘까지도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독립군과 광복군 활동에서도 배신은 반복되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부대는 종종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그 배후에는 밀정이 있었다. 동지의 얼굴을 한 자가 정보를 팔아넘겼고, 그 대가는 일본군의 총탄으로 돌아왔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의 암살 배후에도 밀정의 그림자가 있었으며,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의 상하이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거 체포된 것도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 밀정의 뒷모습은 동포의 얼굴을 한 치명적인 적이었다.
광복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40년 충칭에서 결성된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일본과 싸웠지만, 내부에는 좌우 이념 갈등이 도사렸다. 일부 공산주의 계열은 김원봉(金元鳳, 1898~1958)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했고,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뒤 회유에 넘어가 작전을 누설하는 이들도 있었다. 실패한 작전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배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들은 동지들의 생명을 빼앗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해방 이후에도 배신의 그림자는 길게 이어졌다. 좌우익 대립이 심화되자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에 따라 우익 인사들을 암살·숙청했다. 온건 좌파 지도자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조차 암살되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악순환은 민족 내부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했고, 새 나라 건국의 길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봉기와 숙청으로 인해 피로 얼룩졌다.
세계사에서도 배신의 아이콘은 반복된다. 로마의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85 BC~42 BC)는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100 BC~44 BC)를 찔렀고,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카이사르의 절규는 지금까지도 배신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중국의 여포(呂布,?~199)는 두 번 주군을 바꾸고 동탁을 죽였으며, 미국의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 1741~1801)는 독립전쟁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영국군 장교로 변신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배신과 반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배신의 뒷모습에도 사연은 있다.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어떤 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더 큰 이상을 위해 등을 돌렸다.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지키려 칼을 들었고, 여포는 난세에서 생존을 택했다. 심지어 밀정 중에는 가족을 인질로 잡힌 채 협박에 못 이겨 밀고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뒷모습의 변명을 듣지 않는다. 배신자에게 낙인을 찍고 후세에게 교훈과 경각심을 주어 훗날의 배신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배신자가 때론 영웅이 되기도 한다. 적이 아닌 내 편, 같은 목적일 경우이다. 역사가 던지는 교훈이다.
우리 모두는 뒷모습을 달고 산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뒷모습, 타인이 못 볼 거라고 착각하는 나의 뒷모습, 이기심을 저장하는 뒷모습이 존재하는 한 배신을 피하는 길은 참으로 난제 중의 난제임이 분명하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어둡고 이기적이고 음흉한 뒷모습이 현존하는 한 배신은 현재 진행형임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