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절실함에서 비움으로

by 생각전사

초저녁에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한밤중이다. 서재의 불이 환하다. 불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 순간 허기가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은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검은 허공 속에서 허기, 지금의 허기, 옛날의 허기가 꿈틀댔다.


나와 같은 또래가 다 그러하듯 우리네 청춘은 배고픔과 갈망이 가져오는 허기로 가득했다. 그 고달팠던 시절에 처음 만난 50년 지기 친구 부부를 오늘 점심에 만났다. 늘 생각이 나지만 세상사에 휩쓸리다 보니 가까이 사는데도 본 지 1년이 훌쩍 넘은 터였다. 근황과 최근의 관심사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역시 마음이 통하니 편하고 즐거웠다. 중국식 코스요리로 배를 채우고, 서로의 따뜻한 마음으로 허기를 달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저녁은 건너뛴 채 잠이 든 것이다.


배고픔은 몸이 보내는 강렬한 신호다. 이 신호가 없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음의 허기는 마음 깊숙이 닿는 또 하나의 SOS다. 무엇을 채우라는 신호라기보다, 이 허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묻는 경고에 가깝다.


누구나 끼니때가 지나면 배가 고프듯, 무엇을 간절히 갈망하고 누군가를 못내 그리워하면 마음의 허기를 느낀다. 배고픔은 지금의 신호이고, 마음의 허기는 지나왔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서 온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슬며시 다가온다.


배고픔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위가 비면 몸은 벌벌 떨며 반응한다. 따뜻한 밥에 반찬 몇 가지, 국물 한 그릇이면 해결된다. 채워지는 순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그놈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마음의 허기는 지나간 것, 이룰 수 없는 것,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미 끝난 장면, 말하지 못한 문장, 다시 만날 수 없는 얼굴들이 불쑥 떠오른다. 그리움, 후회, 갈망, 간절함 같은 여러 이름으로.


나이가 들면 몸의 리듬이 느려져 배고픔은 아주 조금으로도 해결된다. 오히려 과식이 불러오는 문제가 더 크다. 그런데 마음의 허기는 더 자주,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느끼는 감정조차 이전보다 더 절실해진다. 채워도 돌아서면 다시 허기가 앞선다. 채움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예후다.


노년의 허기를 달래는 길은 비움을 직시하는 데 있다. 배고픔을 과식으로 달래지 않듯, 마음의 허기를 과잉으로 채우지 않는다. 오래 붙들던 기대와 타이틀을 내려놓고, 다시 불러오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놓아준다. 그러면 허기는 남아 있어도 마음은 잠잠해진다. 텅 빈 방이 오히려 여유로움으로 채워진다.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의 가르침이다.


잠시 느낀 허기를 달래며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쉬이 잠들지 않는 허기는 나를 어쩌지 못한 채 다음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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