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의 미소
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 방에 들어서자 고요가 세상을 압도했다. 18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미소가 내 사유의 공간을 요동치게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젊은 시절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이 말에 깊이 천착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생각이 무엇보다 먼저라고 믿었다.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끌고 가고, 생각이 행동을 만들며, 사유가 곧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몸과 마음의 리듬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이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머물기 시작했다. 생각이 모든 것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생각조차도 몸의 상태와 사회 구조, 문화적 배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건 속에서 흔들리고 제한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변화의 감각에 꼭 맞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과 우리나라 보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청장년기의 나는 로댕의 조각상 쪽에 있었다.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고 턱을 괸 채, 생각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텨내는 그 모습은 투쟁하며 살아가는 젊은 시절의 우리를 닮아 있다. 삶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연속된 전투였고, 사유는 그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다. 생각은 의지였고, 의지는 곧 힘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반가사유상의 표정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한쪽 다리를 가볍게 올린 반가좌, 잔잔한 미소, 긴장 없이 흘러내리는 어깨. 그 사유는 싸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고, 억지로 답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려놓고 비워내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시절인연에 맞는 생각이 천천히 올라오는 듯하다. 오늘 반가사유상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내 사유 방식이 어느새 로댕의 긴장에서 반가사유상의 평온으로 옮겨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삶은 사계절과 닮았다. 봄은 탄생과 유년기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가볍고, 삶은 가능성의 방향으로만 열려 있다. 여름은 청년과 장년의 뜨거운 시절이다. 생각은 로댕의 조각상처럼 치열하고, 몸은 사유를 앞으로 밀어붙일 힘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중년을 지나 노년을 향해 가는 시간이다. 많은 것을 경험했고, 사유는 깊어지지만 몸의 움직임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반가사유상에 더 가까워진다. 겨울은 황혼의 시간이다. 사유는 절제되고 단단하지만, 몸의 한계는 분명해진다. 하고 싶은 생각보다, 그 생각을 감당할 수 있는 육체가 더 중요해지는 시기다.
결국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마주한다. 생각이 존재를 규정하지만, 그 생각은 몸과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젊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유의 깊이보다 그 사유를 지탱할 체력과 마음의 평정이 더 절실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사유로 존재하지만, 그 사유를 오래 지킬 힘은 건강한 몸과 비워낼 줄 아는 마음에서 온다. 로댕은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었고, 반가사유상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다.
오늘 본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의 지혜를 내게 다시금 일깨워 주는 큰 울림이 되고 있다.